ㄱ. 책에 담는 땀방울, 책을 읽는 눈물방울
얼결에 한글학회로 일을 나온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 좋아하는 골목마실 헌책방마실 못하며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에서 시달립니다. 그래도, 이 지옥철에서 비지땀 뻘뻘 흘리며, 그동안 못 읽고 미루어 둔 책을 하나하나 읽어치웁니다. 뒤늦게 마지막 쪽을 덮은 책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생각합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장만하던 몇 해 앞선 그때 다 읽었으면 내 삶과 생각과 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좋은 책을 일찌감치 읽었으니, 저는 참으로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또는, 이제서야 읽게 되었기에, 지난날에는 줄거리만 훑고 덮어놓았을 책을 곰곰이 되씹으며 새삼스레 붙잡을 수 있을까요.
예나 이제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옥철에서도 책을 붙잡습니다. 책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느긋하고 시원하고 따뜻한 곳에서도 안 읽습니다. 전철역 나들목에서 나누어 주는 공짜 신문을 조금 들여다보다가 멀뚱멀뚱 선 채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로서는 출퇴근길 세 시간이 몹시 아까워 한 줄이라도 더 읽으려고 발버둥이지만, 거의 모든 분들한테 출퇴근길은 지루하고 지겹고 고단해서 얼른 벗어나기를 바라는 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책 나온 소식과 인터넷책방 맛보기로는 퍽 눈에 뜨이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를 아침길에 1/3쯤 읽습니다. 읽다가 자꾸 짜증이 나지만 사람들한테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면서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내지 못합니다. 시베리아에 붙들린 서글픈 사람들 눈물방울을 담아내려고 한 책이라 하는데, 눈물방울은 그닥 보이지 않고 꽤 지루한 근현대 역사 이야기가 잔뜩 늘어집니다. 다른 책에 얼마든지 나와 있는 이야기를 굳이 덧붙여 실어야 했는지 궁금합니다. 정작 해야 할 말이 이런 자질구레한 군말 때문에 묻히지 않느냐 싶어 안타깝습니다.
저녁길에 어린이책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다가 코끝이 찡합니다. 눈물이 어립니다. 아침길에 느낀 아쉬움을 갚습니다. 하루 동안 쌓인 고단함을 풀어 줍니다. 밀리고 치이고 밟히는 가운데 눈물바람이 되고 싶지 않아 한동안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꽤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데, 글줄 하나마다 글쓴이 온힘과 넋이 담겨 있다고 느낍니다. "'곧장 되돌아가!' 나는 자신에게 명령했어요. 하지만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말이죠. 상쾌한 바람이 불고, 도라지꽃이 저 멀리까지 한없이 피어 있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그냥 돌아가다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어요.(9∼10쪽)" 지옥처럼 바뀌고 마는 전철길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어서 벗어나고프다고만 생각하고, 나와 살을 비벼야 하고 코앞에 얼굴을 부벼야 하는 사람을 이웃으로 느끼기 어려울까요. 모든 회사원이 지옥철이 아닌 하늘나라 꽃길이나 구름길을 거닐면서 일터를 오갈 수 있다면, 모든 학생이 새벽길이나 밤길이 아닌 햇볕 따사롭고 바람 시원하며 싱그러운 나들이길을 거닐며 학교를 오갈 수 있다면, 우리 삶터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까 하고 생각에 젖습니다. 인천 서쪽 끄트머리에 가까워 오니 전철 손님이 많이 줄고, 다시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ㄴ. 책잔치와 책방과 도서관
지난 9월 5월과 6일 이틀에 걸쳐, 강원도 춘천시 실레마을에서는 '책잔치'가 조촐히 열렸습니다. 춘천 실레마을에는 조그마한 기차역인 '신남역'이 있는데, 이곳은 2004년부터 '김유정역'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세종로나 퇴계로, 또 박지성길 같은 곳이 있다지만, 버스역이나 기차역 들에 사람이름이 쓰이기로는 나라안에서 처음입니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에서 '김유정역'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여 준 일도 대단하지만, 이렇게 춘천 실레마을 조그마한 기차역 둘레에 '김유정문학마을'을 이루어 낸 여느 사람들 힘 또한 대단합니다. 아니,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목소리가 차근차근 모였기에 비로소 '김유정' 하나로 문화와 삶과 역사와 행정이 한마음이 되었다 할 테지요. 춘천 실레마을 책잔치는 '물건과 원고와 식구 하나 남기지 않은' 김유정이라는 옛사람을 기리는 넋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 깜냥껏 우리 새터에서 우리 새삶과 새빛을 일구자는 작은 움직임입니다.
9월 마지막 주말에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어김없이 책잔치가 마련됩니다. 지난 1950년대부터 헌책을 팔아온 책장수들 스스로 돈과 품과 땀과 마음을 모두어서 마련한 이 책잔치는 벌써 여섯 해째 이어오는데, 처음 마련한 해부터 지난해까지 아주 힘겹게 이어왔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헌책방 대접은 푸대접조차 아닌 똥대접이나 막대접인 터라, 시청과 구청 공무원을 비롯해 기자들 눈길과 손길은 '그깟 헌책방이 뭐?'였고, 중앙 언론매체는 '서울도 아니고 부산인데 뭐?'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올해에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부산에만 있고 세계에 내로라할 만한 관광명소 14곳'에 넣어 주시는(?) 한편, 시에서 여러모로 뒷배를 한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헌'책이 아닌 책을 되살리고 아끼던 책장수들 땀방울과 손품이 조금이나마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할까요.
9월 18일부터 서울 홍익대 앞에서는 '와우북페스티벌'이라는 책잔치가 열립니다. 오늘날에는 이렇게 온갖 영어를 뒤섞어 내놓아야 비로소 사람들이 몰려드는 책잔치마당이 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지만, 우리들 생각힘을 좀더 뻗어 나가게 할 수 없는가 싶어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책잔치 하나 서울에서도 벌이니 반가운 일인데, 이와 같은 책잔치 자리에 가 보면 돛데기시장처럼 '책 싸게 팔기' 판만 잔뜩 벌여놓고 있어, 책마을에서 일한다는 분들 생각밭이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나 싶어 서글픕니다. 책을 책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책을 읽은 우리들 매무새와 삶이 새로 태어나도록, 책 하나에 깃든 사랑을 고이 받아먹도록 손길을 내밀기는 그토록 어려운가 싶어 쓸쓸합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하면, 우리 나라 도서관이 책잔치에 함께 나서는 일은 드뭅니다. 출판사들은 서울에서 열리는 책잔치에 책을 싸게 내놓아 '책을 제값대로 팔아야 하는' 동네책방은 씨가 말라 버리게 합니다. 이제 교보와 영풍 아닌 책방을 찾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문득 돌아보면, '책이 죽지 않도록 책잔치를 연다'고 하나, 책이 죽은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작은 책방이 죽고' 있을 뿐이며, 실레마을 책잔치를 함께 기획하고 마련한 춘천시립도서관 같은 도서관이 나라안에 거의 없을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09.18 14:52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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