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할머님들과 남겨진 할머님들

일본군위안부 할머님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으리

등록 2009.09.22 08:36수정 2009.09.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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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의 아름다운 작은 항구도시 통영. 통영에는 유난히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윤이상, 유치환, 유치진, 박경리, 김춘수, 전혁림 등등(일부 과거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통영은 참으로 행복하고 축복받은 도시라고 생각된다.

 

아름다운 통영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부터 16년 전인 1993년, 통영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10여 년 뒤인 2002년 가을 무렵 우연한 기회에 위안부할머님들과 또다른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동안 희미하게 언제가 들어봤음직한 단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흔히 '정신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통영에 위안부할머님들 위한 시민단체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시민단체라고 하기보다는 통영거제에 계신 위안부할머님들을 방문하여 간호하고, 관심을 가져주고 돌봐주는 기본적인 활동에서 막 시민단체로 출발하려는 시점이었다.

 

다가가기 일본군위안부 할머님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이 매년 개최하는 '다가가기 포스터(2006년도)'
다가가기일본군위안부 할머님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이 매년 개최하는 '다가가기 포스터(2006년도)'최철
▲ 다가가기 일본군위안부 할머님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이 매년 개최하는 '다가가기 포스터(2006년도)' ⓒ 최철

 

그때 동문선배의 추천으로 간사를 맡게 되었다. 처음에 간사 제의가 왔을 때 참 망설였다.

지방자치단체 보조금을 지원받는 기관에 근무하는 입장으로 무보수직이었지만 업무가 부담스러웠고, 본격적인 시민단체로 발전시키려하는 단계에서 많은 업무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고, 또한 남자로서 위안부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으로 할머님들과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통영거제에 계신 할머님은 총 6분이었다. 통영에 4분, 거제에 2분, 통영과 거제에 각각 1분씩 2분은 섬에 살고 계셨고, 통영에 3분과 거제에 1분은 거의 독거노인이었고, 나머지 2분은 가족과 같이 살아가고 계셨다. 연세들도 80세 전후로 당시 최고령 할머님이신 득이 할머님(이름 마지막자를 예칭으로 부름)이 84세 정도였다. 그리고 1~2세 차이로 막내 할머님이신 아이 할머님이 78세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할머님들과의 인연은 참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걱정했던 것과 같이 낯섦은 이내 사라졌고, 정이 많으신 할머님들은 친손주 대해주듯이 따뜻하고 살갑게 대해주셨다.

고령으로 인해 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할머님들은 움직이는 종합병동이었지만, 크게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야외활동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난 주어진 업무를 떠나 할머님들과 가족같이 지낼 수 있었다. 몇번을 만나면서 이젠 할머님들과도 서슴없이 농담도 장난도 가끔 간단히 술한잔도 하면서 말벗도 되어드리고 나들이도 다니곤 하였다.

 

정대협 금강산 인권캠프 2003년 10월 정대협 주관 금강산인권캠프에 참가한 통영거제위안부할머님과 시민모임관계자들이 금강산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정대협 금강산 인권캠프2003년 10월 정대협 주관 금강산인권캠프에 참가한 통영거제위안부할머님과 시민모임관계자들이 금강산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최철
▲ 정대협 금강산 인권캠프 2003년 10월 정대협 주관 금강산인권캠프에 참가한 통영거제위안부할머님과 시민모임관계자들이 금강산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 최철

그 다음해부터 할머님들과 전세버스를 타고 전라도로 경상도로 그리고 멀리 대전까지 온천을 가거나 나들이를 했다. 2003년 10월에는 정대협 주관 금강산인권캠프에도 5분의 할머님들과 다녀왔다.

 

하지만 할머님들의 건강은 해가 바뀔 때마다 눈에 띄게 악화했다. 특히 거제의 작은 섬에 살고 계신 이모 할머님의 경우 '태풍 매미'로 정신을 놓는 등 할머니들을 모시고 병원에 다닐 일들이 많아졌다.

 

우리 시민모임은 사실 할머님들의 건강과 편안한 삶이 최우선이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전쟁피해자로서 할머님들이 겪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홍보하고 교육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2003년부터 시민들과 청소년들에게 위안부와 관련한 내용을 알리기 위한 '다가가기'라는 행사와 송년회 등을 개최하여 할머님의 존재와 역사를 알리는 계기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님들은 세상 인연과의 끈을 한 사람, 두 사람씩 놓치고 있다. 2003년 태풍 매미 이후 급속도로 쇠약해진 거제 선이 할머님은 힘든 투병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2007년 8월 3일 86세 일기로 세상의 끈을 놓으셨다. 이어 그달 27일에는 막내 할머님이신 아이 할머니도 투병생활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난해 12월 15일에는 정이 할머님도 고통스러운 투병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어릴 적 일본군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으시고 수십년을 쉬쉬 하며 어렵게 사시다가 90년대 중후반부터 겨우 국가의 지원으로 조금 형편이 나아졌지만 이미 피폐해진 망가진 영혼을 다 치료받지도 못하시고 살다가 떠나신 할머님들.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억울해 울분을 참기 어려웠다.

 

그렇게 먼 길을 떠나신 3분의 할머님을 뒤로 하고 남겨진 3분의 할머님 중 2분의 할머님은 전문요양기관에서, 연세가 제일 많으신 득이 할머님은 홀로 지내시면서 날로 악화되는 건강을 걱정하고 계신다.

 

전국에 많은 위안부 할머님들이 해마다 고령에 각종 합병증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고 계시지만 위안부 할머님의 명예회복은 아직도 제자리에서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분 한분 하늘나라로 보내는 우리네 마음도 마음이지만 남겨진 다른 할머님들의 심정은 얼마나 한이 맺혀 있을지...

 

통영거제시민모임 송년회 2005년도 송년회 모습
통영거제시민모임 송년회2005년도 송년회 모습최철
▲ 통영거제시민모임 송년회 2005년도 송년회 모습 ⓒ 최철

아름다운 세상을 고통속에 살다가 힘겹게 세상을 등진 통영거제의 일본군 위안부 선이 할머님, 아이 할머님, 정이 할머님, 그리고 남겨진 득이 할머님, 선이 할머님, 순이 할머님.

아직은 진정으로 할머님들이 원하는, 우리가 바라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후손들은 이룰 것이라 믿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신 할머님들도 남겨진 할머님들도 아무 걱정 마시고 편안한 안식과 건강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당신들의 고난과 역경은 당신들의 선택이 아니었기에 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남겨진 이들에게 소중한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서 다시는 할머님들과 같이 억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님들의 죽음은 우리의 역사에 소중한 밑거름으로 남겨질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2009.09.22 08:36ⓒ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통영거제시민모임 #일본군위안부 #정대협 #다가가기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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