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상신라역사과학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선덕여왕상
신라역사과학관
4.첨성대 탄생의 정치적배경첨성대의 비밀을 풀어줄 단서를 삼국사기에서 찾아보면 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으로 이어진 신라시대 중엽의 정치적 혼란을 들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김알지의 후손인 경주김씨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시기였지만, 여전히 전통왕가인 박씨는 왕비가문으로써 위세를 유지했고, 다른 전통귀족들도 세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것을 반영하는 것처럼, 법흥왕은 딸이 있었지만 사위인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고, 진지왕은 아들이 있으나 동생인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고, 선덕여왕은 딸이었지만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결혼을 했다고 해도(일설에는 창녕가야의 유력가문인 김인후가 남편이라고 합니다.) 남편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다시 사촌 여동생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천명공주는 남편이 있었고, 아들까지 있었는데도 그들이 왕위계승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렇게 엇박자 행보를 해야 했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선, 진지왕과 진평왕은 형제입니다만 둘은 어머니가 다릅니다. 진지왕의 모계는 박씨고 부인도 박씨입니다. 반면에 진평왕은 모계도 김씨고 부인도 김씨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왕위 계승은 이전의 모든 형식과 다르게 진행됩니다. 진지왕은 형이 개에 물려죽자 왕위에 올랐고,(도대체 왕자가 개에 물려 죽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그도 왕위에 오르자마자 끌어내려졌고, 성골 출신의 임금들 중 유일하게 '악명'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승자가 패자에 대한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악명'을 뒤집어씌운다는 것을 가르쳐왔고요.
이런 상황에서 진평왕은 자신의 정당성을 전통 귀족들에게 보여줘야 했는데요, 이때는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분쟁기였습니다. 오죽하면 수양제에게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를 제발 쳐달라고 부탁했을까요? 물론 수양제는 얼씨구나 하고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협공을 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고, 백제의 공격에 성을 뺏기고 있는 실정이었지요. 당연히 전통 귀족 세력들은 진평왕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칠숙의 난이 그것입니다.
천명공주가 용수(혹은 용춘)과 결혼하는 바람에 왕위계승서열에서 밀린 것으로 보아 전통 귀족들은 여전히 진지왕계를 지지하고 있었고, 천명공주가 그들에 의한 볼모였거나 아니면 진평왕이 민심을 달래기 위해 진지왕계와 혼인을 성사시켰던 것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천명공주는 덕만공주의 언니라고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진평왕은 궁지에 몰렸고, 뒤를 이은 선덕여왕은 이것을 타개해야할 역사적 소명이 있었습니다.
5. 신라천문학과 첨성대첨성대는 신라 천문학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기단부에서 상단부까지 29층으로 돌을 쌓아 음력 한 달의 날수와 일치시키고,
상단부의 숫자를 빼면 층수는 28개. (동양은 28수라고 하여 서양의 황도 12궁에 대비해서 달이 머무는 숙소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 하늘은 28개의 숙소로 나뉘어졌는데 이것을 상징하며,
돌의 총 개수가 일년의 날수 365와 거의 같도록 축조되었고,
창이 있는 중간 층을 제외하고는 상층,하층은 각각 12층, 12달을 상징하고 총 24개는 절기를 상징하며, 기단부에서부터 벽돌의 숫자가 16,15,16,15가 반복되는 것은 절기와 절기사이의 날짜 수입니다. 그리고 몸은 둥글고 단은 네모난 것은 '천원지방'의 동양천문사상을 담은 것으로 한나라 때 동전인 오수전이 둥근 모양에 네모난 구멍을 가진 것을 통해 이 시대에 미치는 영향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첨성대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가, 일본에서는 점성대(占星臺)가 축조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징성을 잔뜩 담은 이 돌탑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가입니다. 달력을 반포하고 하늘의 지배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진평-선덕여왕 대의 정치적 저항을 극복한 것은 이 돌탑을 쌓음으로써 가능해졌던 것일까요?
일단, 별의 관측지로서 첨성대의 입지는 훌륭하지 않습니다. 별을 잘 관측하려면, 동쪽 토함산 위라거나, 남쪽 산위, 북쪽 산위 등등 하다못해 바로 뒤 반월성 위에라도 관측소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별의 관측이라는 것이 하늘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한 그렇습니다. 우라니보르그가 그랬듯이.
그래서 첨성대가 관측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조선시대 관측소가 궁궐 내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것은 말도 안되는 주장입니다. 조선시대의 천문관리들은 특별히 혜성이 나타나거나 이상징후가 있으면 남해안,동해안,서해안 등 주요지점에 파견되어 관측하고 그 데이터를 서운관에 보내 기록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의 참성단에서는 전담 관측자가 상주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첨성대는 하늘을 관측하는 일을 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목적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별을 관측했다면 당시 이웃한 백제에서도 기록한 사실들을 누락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일식기록 등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다 조선시대 관측대는 현재 남아 있는데요, 그 구조가 관측에 적합합니다만 첨성대는 아직까지도 명쾌하게 관측법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흔쾌히 관측대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달력은 중국 중심의 달력이고, 이것을 경주중심으로 바꿔야 했는데요, 그러자면 중국의 남조와 북조가 위치한 곳과 경주가 가진 위도값과 경도값의 차이를 계산해서 보정을 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일을 조선시대에는 '역법교정'들이 맡았는데 제법 정교한 수학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와 달과 오행성의 남중시각을 아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나침반이 없었던 때에 고정된 구조물인 첨성대는 천문관리인 일관들이 간단한 천체관측용으로 쓸모가 있었을 것입니다. 별을 본다는 의미는 이 7가지 칠정의 관측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규표나 해시계설도 일리 있습니다. 바닥에 절기와 시간선을 그려 놓았는데, 세월이 지나 사라졌다고 가정하면요. 하지만 그노몬이라면 상단부위에 뾰족한 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설치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그렇다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서술하면서 빠뜨릴 이유가 없습니다.(게다가 이 설도 주변국에 규표설치에 대한 실례가 너무 없으며 ,남쪽으로 난 창의 미스터리는 여전히 숙제입니다)
기타 상징성은 말 그대로 상징성인데, 이미 돌탑 내에 숫자로 정확하게 천문상수들을 표현한 마당에 뭐 때문에 다른 상징성을 다시 찾아야 할지를 밝혀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처럼 제왕의 천문학을 민중의 달력으로 만들어낸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