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259) 세계사적

―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세계사적으로 조숙한' 다듬기

등록 2009.10.07 11:59수정 2009.10.0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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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적 :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 생각하면, 사대부 또는 그것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이나 독서생들이 거의 불모(不毛)라 할밖에 없는 신학 논쟁을 5백 년이나 계속하였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기이한 일이라 할 만하다 … 어떻든 간에 고려조 말기에 나타난 이들 현상을 위와 같은 눈으로 본다면 이 민족은 세계사적으로 조숙한 셈이다 ..  《시바 료타로/박이엽 옮김-탐라 기행》(학고재,1998) 14, 77쪽


"사대부 또는 그것을 지향(志向)하는"은 "사대부 또는 이를 바라는"이나 "사대부 또는 사대부를 바라는"이나 "사대부 또는 사대부가 되고자 하는"으로 다듬고, '불모(不毛)라'는 '아무것도 없다'나 '부질없다'로 다듬습니다. "계속(繼續)하였다는 것은"은 "이어온 일은"이나 "이어간 모습은"으로 손보고, '기이(奇異)한'은 '놀랄 만한'이나 '보기 드문'이나 '엉뚱한'으로 손봅니다. "어떻든 간(間)에"는 "어떻든지"나 "어떠하든"이나 "어떻든"으로 손질하고, "고려조(-朝) 말기(末期)에"는 "고려 끝무렵에"나 "고려가 저물 무렵에"로 손질하며, "이들 현상(現狀)을"은 "이들 모습을"이나 "이러한 모습을"로 손질해 줍니다. '민족(民族)'은 '겨레'로 고쳐쓰고, '조숙(早熟)한'은 '일찍 철든'이나 '일찍 눈뜬'으로 고쳐씁니다.

 ┌ 세계사적(世界史的) : 세계 역사를 통하여 볼 때 그 지위나 의의가 확인되는
 │   - 양국 정상 회담의 세계사적 성격을 밝히다 /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갖다
 ├ 세계사(世界史)
 │  (1)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적인 연관성을 지닌 세계의 역사
 │   - 대공황은 그 자체가 현대 세계사의 대사건이다
 │  (2) 동양사와 서양사를 합친 역사
 │
 ├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 세계사로 보더라도
 │→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보더라도
 │→ 세계 어디를 보더라도
 │→ 세계 발자취를 보더라도
 └ …

'세계사' 뒤에 '-적'을 붙인 '세계사적'은 말뜻 그대로 "세계사로 볼 때"나 "세계사를 생각할 때"를 가리킵니다. 이는 '한국사적'이나 '일본사적'이나 '유럽사적'이나 '남미사적'이나 '서울사적'처럼 적어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적'을 붙여 매김씨 노릇을 하도록 하고, 이 말투를 무척 아끼고 있습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가 '-적'이나 '-의' 같은 말투를 아끼는 매무새만큼 우리한테 고유한 말투를 아끼며 살았다면 오늘날 우리 말 모습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몹시 궁금합니다. 우리 말다운 우리 말을 아낀 적이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할 우리네 지식 사회요 학문밭이요 배움터입니다. 익히 알다시피 지난날에는 권력 움켜쥔 이들과 권력을 바라던 이들 모두 한문으로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일을 했습니다. 이 단단한 뿌리가 바깥힘에 뽑히고 흔들리면서는 일본말을 하며 생각하고 일을 하고, 또 일본글을 썼습니다. 이러한 새 뿌리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을 즈음 갑작스레 또다른 바깥힘에 뽑히면서 이참에는 영어가 달겨들면서 이 나라 권력을 움켜쥔 이를 비롯해 무언가 밥그릇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지식인은 한결같이 영어를 붙잡느라 바빴습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졌고, 이제는 지식인만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까지 영어를 붙잡고 있으며, 관공서와 학교에서는 어린이와 어르신까지도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일하도록 내몰고 있습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말로 생각하고 말하고 일하고 글쓴 적이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세계사를 돌아볼 때 우리 나라 같은 곳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아니, 유럽을 뺀 모든 힘여린 나라는 우리와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제 겨레말을 잃은 중남미 사람들은 스페인말과 포르투갈말을 씁니다. 필리핀 겨레는 영어를 씁니다. 인도 겨레는 영어를 공용어처럼 씁니다. 대만 겨레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한테 식민지로 억눌리면서 일본말이 많이 스며들었습니다. 아프리카는 어느 나라 식민지로 있었느냐에 따라 영어를 쓰거나 프랑스말을 쓰거나로 갈립니다. 베트남사람들은 프랑스한테 오래도록 눌린 탓에 프랑스빵을 퍽 맛나게 잘 굽는다고 합니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이웃 중국과 일본과 미국한테 억눌리고 있으면서도 우리 말과 글을 이만큼이라도 붙잡고 있는 모습은 대단한 일이라 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누구나 알 듯, 지구에서 우리 나라는 아주 조그맣습니다. 사람 숫자는 제법 많다 하지만, 아주 조그마한 나라인 한국입니다. 이 조그마한 나라가 그렇게 힘세고 대단했던 나라한테 짓눌리고, 오늘날은 유럽과 미국과 일본과 중국 문화에 휩쓸리면서도 우리 말글을 그예 빼앗기지는 않고 있어요. 안타깝게도 곳곳이 생채기가 나고 도려지고 무너지기는 했지만, 아직 뼈대와 바탕틀은 어느 만큼 살아 있습니다. 더구나 '한글날'이라고 하는 기림날이 하루 있기까지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的'을 붙인 '세계사적' 한 마디를 꼬투리 잡아 왜 이런 말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적바림하고 있지만, 이 말투를 안타깝게 잘못 쓰는 분이 제법 많은 가운데 이러한 말투에 물들거나 매이지 않으며 슬기롭고 훌륭하게 말하고 글쓰는 분 또한 제법 많습니다.

 ┌ 세계사적으로 조숙한 셈이다
 │
 │→ 세계사에서 조숙한 셈이다
 │→ 세계 역사에서 일찍 눈뜬 셈이다
 │→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일찍 깨우친 셈이다
 │→ 세계 여러 나라를 살폈을 때 일찍 깨달은 셈이다
 └ …

곰곰이 따지고 보면, 옳게 생각하고 바르게 꿈꾸며 착하게 걸음을 걷는 분들은 아직 당신이 모르거나 깨우치지 못한 대목은 건드리지 못해도, 당신이 알아채거나 깨우친 대목은 하나하나 바로잡거나 추스르면서 아름다워집니다. 옳게 생각하지 않거나 옳게 생각하려 하지 못하는 분들은 당신이 알아채거나 깨우치더라도 당신 매무새를 고치거나 바로세우지 않습니다. 생각과 삶과 말이 하나된 이들은 늘 아름답습니다. 생각과 삶과 말이 동떨어진 이들은 언제나 '말 지식'과 '글 지식'은 많으나 제대로 여미거나 엮지 못합니다.

말법을 잘 알고 토박이말을 널리 안다고 해서 우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법을 잘 모르고 토박이말이 무언지 제대로 모른다고 해서 우리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삶과 내 생각과 내 말이 어떠하고, 내 이웃 삶과 내 이웃 생각과 내 이웃 말이 어떠하며, 내 식구 삶과 내 식구 생각과 내 식구 말이 어떠한가를 고이 살피고 껴안는 마음그릇이 있으면 누구나 시나브로 알맞고 싱그럽고 고운 말글로 뻗어나갑니다. 다리품을 팔고 몸품을 팔며 땀방울 하나에 밴 웃음과 눈물을 살갗으로 익힌 분들은 언제라도 알차고 해맑고 어여쁜 말글로 거듭납니다.

 ┌ 양국 정상 회담의 세계사적 성격을 밝히다
 │→ 두 나라 대표가 만난 일이 세계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밝히다
 │→ 두 나라 대표 만남이 세계 역사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히다
 │
 ├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갖다
 │→ 세계사로 볼 때 큰뜻이 있다
 │→ 세계사로 보면 큰뜻이 있다
 └ …

말다운 말이란 생각다운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생각다운 생각이란 삶다운 삶에서 비롯합니다. 삶다운 삶이 바탕에 깔리지 않고서는 생각다운 생각이 샘솟지 않습니다. 생각다운 생각이 샘솟지 않는 삶이라면 말다운 말을 끄집어내지 못합니다.

말을 배우는 우리는 한결같이 '말에 깃든 생각'과 '말이 태어난 삶'을 함께 배우는 셈임을 곱씹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에는 낱말과 말투와 말법만 배우지 않고 '말을 쓰는 사람'과 '말에 담긴 넋'과 '말을 하는 사람 삶'과 '말이 이루어진 터전'을 함께 배우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말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옳게 잘하는 사람은 '말 지식인'이 아니라 '말 살림꾼'입니다. 오롯이 선 한 사람입니다. 말은 자랑이 아니기 때문에, 영어를 뇌까리든 한문을 덕지덕지 붙이든 스스로 얼굴에 똥을 바르는 셈입니다. 말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랑이기에, 내가 말하는 대로 나한테 돌아옵니다. 말은 무엇을 어떻게 나누더라도 믿음이기에, 내가 살아가는 대로 이웃한테 퍼지면서 서로서로 삶을 북돋우거나 깎아내립니다. 말 한 마디는 천냥 선물이면서 천냥 빚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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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적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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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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