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리의 사현정. 사현(四賢)은 안축의 아버지 안석과 그의 세 아들을 이른다.
장호철
안축은 1287년(충렬왕 13)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여 단양부주부 등을 지냈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하여, 그곳 관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로 돌아와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 존무사(충숙왕 때에 임시로 존재했던 지방관)로 파견되었다. 그 후, 상주목사 등을 지내고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순흥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관동별곡>은 1330년(충숙왕 17)에 안축이 강원도 존무사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와 유적 및 명산물을 노래한 경기체가다. 이때 근재는 마흔네 살. 250년 뒤인 1580년(선조 13)에 역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마흔다섯의 송강 정철이 가사 <관동별곡>을 지었으니 몇 세기를 넘어 강원도를 노래한 두 시인과 노래의 인연은 남다르다.
<관동별곡>은 전체 9장으로, 위풍당당한 순찰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의 서사 1장에 이어, 학성, 총석정, 삼일포, 영랑호, 양양, 임영, 죽서루, 정선을 각각 노래했다. <관동별곡>은 '실재하는 자연을 주관적 흥취로 여과하고 관념화하여 나열하여, 그 미감을 절도 있게 표출함으로써 사대부 특유의 세계관을 작품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海千重(해천중) 山萬壘(산만첩) 關東別境(관동별경) 碧油幢(벽유당) 紅蓮幕(홍련막) 兵馬營主(병마영주) 玉帶傾盖(옥대경개) 黑槊紅旗(흑삭홍기) 鳴沙路(명사로) 爲(위) 巡察景(순찰경) 幾何如(기하여) 朔方民物(삭방민물) 慕義趨風(무의추풍) 爲(위) 王化中興(왕화중흥) 景幾何如(경기하여) 바다 겹겹 산 첩첩인 관동의 절경에서 푸른 휘장 붉은 장막에 둘러싸인 병마영주가 옥대 매고 일산 받고, 검은 창 붉은 깃발 앞세우며 모래사장으로 아, 순찰하는 그 모습 어떠합니까? 이 지방의 백성들 의를 기리는 풍속을 쫓네. 아, 임금의 교화 중흥하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 <관동별곡> 제1장
이 노래는 형식상 여러 가지 파격을 보인다. 이 같은 정제되지 않은 형식은 경기체가 장르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한다. 실제 노래할 때, 제1장의 4구와 6구는 각각 '위 순찰ㅅ경 긔 엇더니잇고'와 '위 왕화중흥ㅅ경 긔 엇더니잇고'로 불리었을 것이다.
<관동별곡>에는 피폐한 현실이 없다<관동별곡>은 송강의 가사와 마찬가지로 금강산 일대의 풍치를 찬양하고 그 자연 속을 노니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이 노래는 <죽계별곡>과 함께 양반들의 한가한 생활 풍경과 현실도피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근재의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에 실린 한시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당대는 외세의 압박과 외세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과 사원세력의 횡포에다 계속되는 왜구의 침입 등이 그치지 않는 내우외환의 시대였다.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걸식, 권문의 종이나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피폐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근재는 <관동와주>의 한시에서 존무사로 강원도를 돌면서 목격한 피폐한 백성들의 삶과 구제창생의 의지를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안축의 <관동별곡>에서는 피폐한 민중의 모습이나 고뇌하는 관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경기체가라는 장르의 제약이라고도 하고, 여말 신흥사대부 문학의 양면성으로도 설명된다. 현실의 부정적 요소들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개혁해 나가는 한편, 자신들의 위치나 풍류가 고려후기 권문세족에 못지않음을 과시할 필요도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