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란 남자에게 전화번호를 받다

[이란 여행기 43] 쉬라즈의 밤 골목에서

등록 2009.11.19 13:51수정 2009.11.1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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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남자한테서 받은 전화번호와 전화카드.
이란 남자한테서 받은 전화번호와 전화카드.김은주

샤에 체라그에서 쫓겨나서 작은 애와 함께 쉬라즈의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홀가분함과 비례하는 강한 미련이 내면에서 투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걸었습니다. 작은 애도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지쳤는지 역시 말이 없었습니다.

숙소를 향해 한참 걷고 있을 때 옆으로 누군가 다가서며 말을 시켰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남자의 존재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란 남자들이 말을 걸  때도 많기에 그런 경우려니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답을 안 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는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가 샤에 체라그에서 나를 봤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봤느냐, 샤에 체라그는 왜 외국인을 들여보내지 않느냐 등 샤에 체라그와 관련한 대화를 서툰 영어로 짤막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중동에서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하는 남자들은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는 걸 어느 책에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경찰이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나쁘게 보지 않았을 텐데 경찰이라고 하는 바람에 내 머릿속에 있던 공식인 '경찰은 곧 사기꾼이다'가 떠오르면서 그 남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이 다 거짓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래서 선입견이 무서운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내게서 그는 사기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모도 좀 진실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기름통에 빠졌다 건져 올린 모습이었습니다. 뒤로 삭삭 빗어 넘긴 머리는 기름기가 잘잘 흘렀고, 짧은 콧수염도 사기꾼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보였습니다. 거기다 옷차림도 이곳 쉬라즈 사람들하고는 좀 달랐습니다. 쉬라즈는 햇볕이 강해서 대체로 사람들이 까무잡잡하고 옷차림도 이스파한이나 테헤란의 대도시 사람들하고는 좀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도시 사람처럼 말끔했습니다.

역시 그는 자신은 쉬라즈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쉬라즈 사람이 아닌 뜨내기라는 것도 그가 사기꾼임을 입증하는 단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정황으로 봐서 그는 사기꾼임이 확실하니까 상대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숙소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면서 계속 따라왔습니다. 찰거머리처럼 붙어 따라오면서 나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고 또 할 말이 없으면 묵묵하게 걷기만 했습니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것일까, 돈을 원하는 것일까? 지금 전 재산이 복대에 있는데 으슥한 곳에서 내 돈을 빼앗는 것은 아닐까?'


오만 생각이 다 들면서 제발 남자가 우릴 내버려두고 자기 길을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그럴 기미가 안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대로를 따라 걷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래도 지나다니는 거리고 또 가로등도 환하고 차들도 다니기에 남자가 우리 돈을 빼앗기에 그리 호락호락한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괜찮아. 우린 둘이잖아. 둘이서 덤비면 못 이길 것도 없어. 그리고 큰 길로만 따라가면 돼.'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하고 있을 때 남자가 나에게 뭐라고 했습니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이 남자가 원하는 게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전화가 없다고 하자 남자는 연필과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종이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종이와 함께 전화카드도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공중전화로 다가가서 전화를 거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나에게 내일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외국 여자를 여자 친구로 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원하는 건 외국 여자 친구였던 것입니다.

참 뜻밖이었습니다. 난 분명히 딸과 함께 걷고 있었는데 딸이 있는 여자에게 여자 친구가 돼 달라고 말하는 남자는 더 징그럽게 여겨졌습니다. 남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게 되니까 더 불편했습니다. 

남자는 내가 진짜 자기 여자 친구라도 된 것처럼 숙소 가까이 왔을 때는 주스를 마시지 않겠냐고까지 물었습니다. 마시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숙소 앞에서 나에게 내일 꼭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하고는 돌아갔습니다.

물론 난 그에게 전화를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새벽에 쉬라즈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도 내가 꼭 전화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화 거는 방법을 가르쳐줄 때 난 이해를 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전화 거는 방법을 몰라서 전화를 못했다고 생각했겠지요.
#쉬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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