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아트북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일컫는 〈조선일보〉 기자입니다.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라고 하는 일본 글쟁이를 뛰어넘는 글쟁이를 꿈으로 삼고 있는 서른한 살 젊은 넋입니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를 쓴 곽아람 님은 당신 일터를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지만, 〈조선일보〉는 조금도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곽아람 님 당신이 〈조선일보〉에 다니기 때문에 이 신문이 나쁘다거나 못된 짓을 한다거나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어디에서 일을 하고 무엇을 읽으며 어떻게 살든 세상 흐름은 옳고 바르고 알맞게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보수 신문이 아닙니다. '수구 기득권' 신문입니다. 글쓴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보수 신문에서 일하는 모습'하고 '아일랜드 망명자 코즈모폴리턴 조이스'하고 견주면서 쓴웃음을 짓는데, 누군가와 스스로를 견주는 일은 자유입니다만 밑바탕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견주기란 부질없는 말장난입니다. 뜬금없는 둘러대기입니다.
곽아람 님은 〈조선일보〉에 들어간 다음부터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틀림없이 곽아람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그림이 그녀에게》에 이어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곽아람 님 당신은 부산과 경남 진주를 거쳐 서울에서 살면서 광화문 큰길을 거닐면서 기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 당시의 국어 시간에 우리는 "난 보랏빛이 좋아!"라는 소녀의 말에 밑줄을 쫙 긋고 선생님이 불러 주는 대로 "보랏빛 = 죽음을 상징하는 색, 소녀의 죽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적어 넣곤 했다. 보랏빛과 죽음과 복선의 관계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단골로 출제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눈에 따가웠다"라는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은 잊어버리고 오직 기계적으로 암기한 보랏빛에 대한 구절만 머리속에 남겨 놓은 채 성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어른이 된 후에도 소설을 떠올리고, 다시 읽고, 어렸던 중학생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인 걸까 … 근 20년 만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고 나자 저절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악상惡喪'과 '잔망스럽다'의 뜻을 달달 외우며 읽었던 열네 살 때와는 판이한 감정이었다 …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강의를 빼먹어도, 숙제를 해 가지 않아도, 어떤 물리적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던 낯선 체제가 혼란스러웠던 우리 신입생들은 과방에 우루루 몰려 앉아 수군거렸다. "왜 이곳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무얼 하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지? 담임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어." .. (66, 68, 218쪽)곽아람 님 책은 저보다 우리 옆지기가 먼저 읽었습니다. 허먼 멜빌을 아주 좋아하는 옆지기는 멜빌이 쓴 책은 헌책방을 샅샅이 살펴 거의 모든 판본을 다 모아서 거듭 읽었습니다. 저는 이에 발맞추어 1960년대에 나온 영화 대본(영화 '모비딕' 번역판 대본)을 헌책방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선물로 사 주기도 했습니다. 곽아람 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서도 허먼 멜빌 문학을 다룹니다. 그러나 곽아람 님이 다룬 멜빌은, 또 박경리는 박완서는 황순원은 최인훈은 카프카는 레핀은 포크너는 호손은 조이스는 …… 곽아람 님 스스로 당신 길을 찾으려고 만난 책이 아니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억지스레 읽거나 외워야 했던 시험공부였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며 '독후감 보고서'를 내야 하는 책이었습니다.
옆지기가 들려주는 말로도 느끼고 저 스스로도 이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그리고 곽아람 님 스스로도 밝힙니다.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 읽은 책은 '읽기'조차도 하지 않은 숫자와 글자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제서야 뒤늦게 다시 읽으며 지난날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한 아름다움과 빛남과 사랑스러움을 받아들이며 눈물을 흘린다고.
.. 작가의 분신임에 틀림없는 가브리엘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눈에 안경을 쓴" 깐깐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소설을 처음 읽은 지 정확히 8년 반 만에 다시 책을 꺼내어 읽으면서, 그새 이른바 '보수 신문' 기자가 된 나는 영국 보수 신문에 글을 쓴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부터 비난받는 가브리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국가도, 종교도, 가정도 섬기지 않겠다"면서 37년을 고국 아일랜드를 떠나 망명자로 떠돌았던 코즈모폴리턴 조이스도 참 살기 힘들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 (100∼101쪽)곽아람 님은 짧으면 예닐곱 해, 길면 스무 해까지 거슬러 생각하면서 당신 책읽기가 이제서야 바른 자리로 접어들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직 곽아람 님은 '책읽기'로 스며들지는 못합니다. '책훑기'로 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책읽기를 한다고 할 때에는 줄거리를 읊거나 주인공 이름을 들먹이는 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삶이 달라지고 우리 눈길이 새로워지며 우리 몸이 거듭나는 데로 이어집니다. 참되고 그릇된 책읽기가 아니라, 책읽기라면 '줄거리 새기기'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죽이려고 책을 손에 쥐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괜한 겉멋과 겉치레를 키우고자 책을 사들여서 집구석 한켠에 으리으리한 서재를 키워 놓지 않으니까요.
오로지 내 마음밭을 따뜻하게 하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마음바탕을 넉넉하게 일구고자 책을 '읽'습니다. 오로지 내 생각줄기를 알차게 갈고닦고자 책을 '읽'습니다. 헌책방에서 한 사람 손때 묻은 책을 찾아서 읽든, 도서관에서 숱한 사람 손길을 탄 책을 빌려서 읽든, 새책방에서 주머니돈을 탈탈 털어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장만하여 읽든,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삶에서 무엇이 모자라거나 허전하거나 아쉬운가를 헤아리면서 어제와는 달리 살아가려는 매무새가 됩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책을 읽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 당신이 어리고 푸른 날에 그러했듯이 오늘날 어리고 푸른 넋이 똑같이 '시험지옥에 매인 채 아름다운 문학과 삶을 못 느끼고 바보 입시기계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더 곽아람 님 당신이 스스로 '보수 신문'이라고 밝히는 그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나는 말했다. "나는 취직한 이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어." … A+를 받아 완벽한 '학점 세탁'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그 리포트의 이면에는 소설의 주인공을 미화해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었다 .. (221, 223쪽)스스럼없이 내 삶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된다면 반갑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내 삶을 가꾸려 하는 땀방울이 배이지 않는 글쓰기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안타깝습니다. 책읽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내 이야기와 내 삶을 끄적이는 일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두질 같은 끄적거림이 아니라 한다면, 말 그대로 글'쓰'기가 되고자 한다면, 나 스스로 '읽'은 책을 어떻게 온몸과 온마음으로 '삭'이는 가운데 내 삶과 눈길과 매무새가 '새' 길로 접어들고 있는가를 '당차'게 밝히는 뚜벅뚜벅 걸음걸이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림을 말하기 앞서 그림을 당신 삶으로 녹여내 주소서. 책을 이야기하기 앞서 책을 당신 삶으로 감싸안아 주소서. 삶이 묻어나지 않고서야, 곽아람 님 당신이 우러러보는 요네하라 마리 같은 사람들 머리끝에도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삶이 묻어나는 당신이라면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는 요네하라 마리대로 아름답고 곽아람 님 당신은 곽아람대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황순원은 황순원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헤세는 헤세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곽아람 님은 이 책 하나에서 '곽아람은 어떤 삶결'이라는 목소리와 몸짓과 빛깔을 보여주고 있는지요? 아직 중고등학교 '시험공부 독후감'과 대학교 '학점따기 보고서' 둘레에서만 맴돌고 그칠 생각인지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 그리고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
곽아람 지음,
아트북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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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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