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의 한 장면.
KBS
간첩이 아니었으나 간첩 혐의가 씌워졌었고, 오기가 나서 진짜 간첩이 되어버렸던 현준은 순식간에 대한민국의 국운을 양 어깨에 짊어진 영웅이 된다. 대통령이 그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고, 선화는 여전히 충실하게 그를 보좌하고 승희는 변함없이 그를 찾아 헤맨다. 이제 남은 일은 서울 시내 어느 곳에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을 찾는 일.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지금까지 대로라면 현준은 곧 핵폭탄을 찾아 제거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도 그가 왜 핵 테러를 막아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극의 초반 승희에게 조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했기에 NSS에 입사했다고 말했던 현준.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 사명감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백산에게 배신당했다는 걸 알자마자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철영과 접촉해 북한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북한 테러 팀의 진짜 목적이 핵 테러라는 것을 깨닫자 이젠 핵 테러를 막기 위해 돌아선다. 철영에게는 북남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는 당위가 있지만, 현준에겐 그것마저도 부족하다. 현준이 숨 가쁘게 뛰어다니는 이유가 핵 테러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방해하고 남한과 북한의 정권교체를 꿈꾸는 아이리스의 야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만 했다.
로버트 러들럼 원작, 맷 데이먼 주연의 세계적인 첩보액션 시리즈 <본 아이덴티티> 3부작에 우리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본 시리즈가 지극히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묘사를 했다는 데에 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대악당도, 핵폭탄과 슈퍼카도, 8등신의 금발의 미녀도 등장하지 않지만 거기엔 그 어느 첩보액션 영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긴박함과 스릴, 쾌감이 모두 들어 있었다.
영화에서 제이슨 본(맷 데이번 분)은 CIA에 쫓기는 삶을 산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도 본은 가공할 신체능력과 재빠른 상황판단에 이은 기지로 아슬아슬하게 그 상황을 모면한다. 그리고 시리즈의 감독인 폴 그린그래스는 그런 순간을 결코 허투루, 얼렁뚱땅 넘기지 않는다. 관객들이 본이 어떤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는지, 그 순간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리스>가 본 시리즈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현준은 총알도 피해간다는 첩보액션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극복해내고 끝까지 살아남을 거란 건 <아이리스>를 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과연 현준이 어떻게 그 위기의 순간을 극복해냈느냐다. <아이리스>는 그 과정에 대한 묘사도 지극히 불친절하다. 시청자들은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다가도 이내 맥이 탁 풀린다.
김밥은 밥과 단무지, 햄과 여러 채소들을 모두 모아 김으로 말아냈을 때 완성된다. 밥과 각종 반찬들이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김이라는 고리로 모아 말지 않는다면 그것은 김밥이 되지 않는다. 지금 <아이리스>는 말지 않은 김밥과도 같다. 밥 따로 단무지 따로 채소 따로, 다 따로 놀고 김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따로 먹으면 어때?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소화되는 건 다 똑같아"라고 제작진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먹는 시청자도, 먹으라고 내놓는 제작진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김밥이 아니라는 것을. 시청자들이 지금 그것을 허겁지겁 먹는 것은 단지 배가 고프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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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본과 <아이리스> 이병헌의 결정적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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