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저녁 열린 대전충남 민족민주 열사 -희생자 합동추모제
심규상
대전충남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가 집계한, 1980년 이후 대전충남 지역에서 활동하다 민주주의 제단에 생명을 바친 민족민주열사·희생자는 모두 28명이다.
첫 희생자는 충남 아산에서 영농후계자회장을 역임했던 고 오한섭(당시 28세)씨다. 천안 농고 축산과를 졸업한 후 새마을 청소년 낙농경진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남다른 축산기술로 영농의 꿈을 키웠던 그는 1986년 3월 정부의 영농정책에 항의하며 음독해 유명을 달리했다.
81년 영농후계자 자금 200만원을 받아 5년 동안 한우를 길렀지만 그의 수중엔 밀린 사료 값이 전부였다. 당시 전경환씨가 회장을 맡았던 새마을운동 중앙본부에서 외국 소와 쇠고기를 수입하면서 소 값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고 오한섭씨는 무책임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항의하며 "용기! 폐기! 사기! 빚! 빚! 420만원!"이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사망했다.
몸 불사른 박응수·최덕수·윤영하·윤창영·이해남자신의 몸을 불살라 목숨을 끊은 열사만도 5명에 이른다. 고 박응수(당시 28세)씨는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군정종식'과 '야권 후보단일화'를 외치며 대전역광장에서 분신했다. 경찰은 그의 죽음이 몰고 올 파장을 우려해 시신마저 빼앗아 한밤중에 대전 동구 산내면 하소리에 몰래 안장하기도 했다.
1988년 5월 18일에는 고 최덕수(당시 20세)씨가 단국대천안캠퍼스 내에서 광주영령 추도식 도중 "광주항쟁진상규명"과 "국정조사권발동"을 외치며 분신했다. 87년 6월 항쟁에도 불구하고 5공 진상이 유야무야되는 현실에 온 몸을 던져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