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合)을 향한 창(唱)과 극(劇)의 변증법적 진화

창극 <적벽>을 보고

등록 2009.12.12 12:42수정 2009.12.12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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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은 진화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문화예술의 지평이 변하고 관객의 감수성이 다양해지고 있는 마당에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타령만 늘어놓을 수는 없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김수영 시인은 이렇게 외쳤지만, 이는 전통 자체를 우리들 스스로 폄하하고 부끄러워하는 풍토가 일반화 되어있던 시절의 얘기다. 적어도 전통문화가 문화콘텐츠의 보고(寶庫)로 주목을 받고 있는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이런 식의 당위적 외침만 되뇔 수는 없다.

 

국립극장이 '우리시대의 창극'을 내세우며 창극의 대중화, 세계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의 일일 것이다. '우리시대의 창극'과 별도로 진행되는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기획도 이런 진화를 위한 몸부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창극의 소재를 기존 판소리에 국한시키지 않고 외국의 고전으로까지 확대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하지만 진화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니 모든 일이 그러하듯 쉽지 않다고 해야겠다. 의미 있는 일치고 직선으로 진화 발전하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모두 갈 지(之) 자 비슷한 행보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진화의 밑거름으로 삼기 십상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노력하는 한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갈팡질팡하는 것은 그 저변에 서로 다른 큰 힘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극에서 그 힘은 물론 창(唱)과 극(劇)이다. 때로는 창의 음악적인 부분이 강조되고 때로는 연극적 요소의 보완을 더 강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창이 창극의 근원을 이루는 것으로 전통적이라면 극은 창극을 창극이게 해주는 것으로 현대적이며 대중지향적이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처럼 서로 길항작용을 하며 미학적 긴장을 조성한다. 그러니 이 상반된 힘은 창극의 저해요소가 아니라 그 발전의 원동력이라 해야겠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변증법적 진화의 터전으로, 합(合) 창극의 정(正)이 창이라면 반(反)은 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창극 [적벽]  관운장이 조조를 포로로 잡는 장면
창극 [적벽] 관운장이 조조를 포로로 잡는 장면이종민
▲ 창극 [적벽] 관운장이 조조를 포로로 잡는 장면 ⓒ 이종민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창극 <불타는 적벽>은 극의 이끎에 상당히 경도된 실험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연출자가 바로 우리시대 대표적인 연극연출가인 이윤택이라는 점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창극배우들의 연기술을 강조하는 그 자신의 평소 소신이나 창극을 "독자적 공연미학을 지닌 근대 대중극"이라 규정하며 판소리에의 예속을 경계하는 그의 이번 연출의도 발언에서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런 편향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적 내지는 대중적 볼거리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이 작품이 선보이는 다양하고 풍성한 연극적 장치들은, 전통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로, 분명 반길 일이다. 하지만 창의 전통을 더 소중하게 챙기는 이들에게는 이것들이 오히려 소리의 아기자기한 미학을 방해하는 요소로 보일 수 있다. 화려한 연극적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장판교 싸움 등이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이나 '소리의 길'을 막는 군더더기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창극다움'을 소리 혹은 음악에서 찾는 이들에게는 적벽대전 장면에서 도창이 지휘자석에 서서 창을 하는 모습도 볼썽사납게 보일 수 있다. 그 '돌출행동'이 소리감상만 방해할 뿐 아니라 역동적인 전투장면에 눈길 주는 것도 가로막기 때문이다. 오히려 귀는 귀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판소리 가락을 즐기면서 눈은 눈대로 장대한 '불의 연출'을 감상하게 해주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극적 요소를 '볼거리'를 위한 것쯤으로 치부하려 하는 이들도 <적벽>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연극적 배치에 대해서는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조에 의한 관우의 체포 그리고 관우에 의한 조조의 체포. 이 두 장면을 통해 영웅조차 운명에 조롱당하고 마는, 우리들 삶의 비극적 모습, 전쟁의 허무와 파괴성이라는 주제가 수미일관 잘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부분 관련 아쉬움이 있다면 첫 장면에 이어지는 '도원결의'의 일탈(일종의 플래시백이라 하겠는데)이 뜬금없어 극의 흐름을 흩트린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조조의 마무리가 너무 짧고 밋밋하다는 것. 특히 마지막 절정 부분에는 삶의 비극성과 전쟁의 허무함에 대한 절절한 '아리아' 하나쯤 배치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창의 매력에 흠뻑 젖어 감동의 마지막 박수를 칠 수 있을 만큼의 길이와 감칠맛을 지닌.

 

자막이 배우의 소리와 자주 일치하지 않은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극 자체의 진정성을 훼손하기도 했는데 창의 의미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것마저 지나치게 연극적인 효과를 노리느라 시간에 쫓겨 자행된 편법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공연 내내 떨쳐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장대하고 화려한 극적 무대 덕에 관현악단 연주음악이 충분하게 살아나지 못한 부분도 서운할 수 있다. 국가 브랜드 창극 <청>의 1막과 2막 끝의 그 절절한 연주, <적벽가>에 토대를 둔 창극에서 그런 서정적인 것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느 대목에선가는 시각을 접고 청각에 취해, 이 극이 노리는 진지한 주제를 곱씹어보는 순간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것들 때문에 관객 청중들이 작품에 몰입하지 못하고 계속 비평가의 입장에 서게 되는데, 이것은 전략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또한 군사설움타령 이전까지 극의 분이기가 너무 무거워 관객들의 마음을 진작시키지 못한 점도 연출 상 아쉬운 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결국 이 때문에 관객들은 상당 기간 밖에 서서 팔짱을 끼고 서있는 꼴이 되어 창극의 장기인 흥과 신명에 끼어들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창극 <적벽> 관람을 마치고 총감독 유영대, 제갈양 역을 맡은 박애리 등과 함께
창극 <적벽> 관람을 마치고총감독 유영대, 제갈양 역을 맡은 박애리 등과 함께이종민
▲ 창극 <적벽> 관람을 마치고 총감독 유영대, 제갈양 역을 맡은 박애리 등과 함께 ⓒ 이종민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적벽> 실험이 거둔 성과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제껏 어느 창극에서도 시도해보지 못한 다양한 연극적 장치, 변화무쌍한 무대전환, 화려한 미장센, 폭넓은 연출기법,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분명 대중화와 세계화를 꿈꾸는 '우리시대의 창극'이 반드시 계승해야할 '위대한 유산'이다.

 

기실 판소리 <적벽가>는 창극으로 만들기가 특히 어려운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기교보다 힘과 깊이'를 함께 요구하며 장대한 규모의 전쟁이야기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 판소리 자체로도 남성 소리꾼조차 그 공연을 꺼려해 온 게 사실이다. 이것을 무대화할 경우 어지간한 공력을 들여서는 소박하다는 평을 극복할 수 없고 제대로 하자면 어마어마한 무대장치와 탁월한 연극적 연출이 필요하다.

 

이번 '불타는 적벽'은 에두르지 않고 두 번째 길을 택해 전면승부를 걸었다. 이런 도전만으로도 이번 공연의 의미는 충분히 새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창극에서 해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무대적 실험을 해봄으로써 창극와 판소리에 낯설어하는 사람들로부터도 감동을 이끌어낸 것은 특히 높이 살 일이다.

 

그러나 완성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아니 예술에서 완성은 있을 수 없다.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과감한 도전과 실험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 창극을 통해 이제 극이 정(正)이 되고 창이 반(反)이 되었다. 이윤택이 크게 연극적 화두를 던졌으니 이용탁과 김경숙 아니면 안숙선이 이에 견줄만한 깊이와 울림의 음악과 창으로 화답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합(合)의 유영대가 '우리 시대의 창극'의 전범을 견인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전주에서 서울까지 길은 멀지만 이런 기대가 있어 창극 보러 가는 일이 언제나 반가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미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12.12 12:42ⓒ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 [미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창극 #적벽 #적벽가 #판소리 #유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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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주를 가장 한국적인 도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살아숨쉬는 곳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마이유스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살기좋은 전주의 모습을 홍보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제가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보내주는 음악편지도 연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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