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골목길 바닥은 동물과 자연으로 양각되어 수놓아져 있다.
모종혁
탁록대전에서 한족에게 패한 치우천황, 민족 대이동시장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묘족의 전설에 따르면, 기원 전 3000여년 전 치우천황 셋째 아들이 이끌던 부족은 지금의 장시(江西)성 일대에서 거주했다.
탁록(涿鹿)대전에서 아버지 치우천황이 화하족(華夏族·한족)에 패하자, 민족의 엑소더스가 이뤄졌다. 셋째 아들은 부족을 이끌고 정든 고향을 등져서 남쪽 지방으로 이동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묘족 민요는 장시성에서 구이저우에 이르는 긴 여정을 노래하고 있다. 민요는 패퇴한 민족의 이동사가 아닌, 묘족으로서 정체성을 찾고 묘족문화의 체계를 다지는 자기발견의 역사를 담고 있다.
긴 여정 끝에 시장에 도착한 묘족은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왕조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많은 왕조가 중원에서 흥망하고 전란이 중국 대륙을 휩쓸었지만, 시장의 묘족은 '관외'(管外) 지역으로 자처하면서 독립성을 유지했다.
18세기 청나라 옹정제에 이르러 시장은 중앙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묘족을 천시하는 듯한 '지장'(鷄講)이란 명칭으로 정식 행정구역에 편입된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구이저우를 통치했던 군벌은 행정력 강화를 위해 시장에 대한 동화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깊은 오지인데다 왕래마저 불편한 지리적 위치는 시장에 대한 외부의 영향을 차단했다. 리푸중(李福忠) 전 시장초등학교 교장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시장에는 간간이 장사를 위해 시장에 오는 외지인이 있을 뿐 외부와의 교류가 전무했다.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은 묘족의 원생태지 시장을 그대로 두질 않았다. 험난한 산길을 따라 시장까지 들어온 홍위병들은 묘족을 괴롭혔다. 조상숭배사상과 전통문화를 '사구'(四舊,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로 규정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리푸중은 "문혁 10년간 시장 묘족은 숨죽인 채 조상을 모시며 묘족의 전통문화와 풍속을 근근이 이어갔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