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진씨가 80년대 보안사에 근무하면서 체험한 내용을 기록한 <보안사>(소나무).
오마이뉴스
흥미로운 사실은 김씨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검사가 현재 '친북인명사전'을 작성하고 있는 고영주 현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점이다. 고 위원장은 현대사의 격동기였던 80년대와 90년대에 대검과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근무했던 '대표적인 공안통 검사'다.
그런데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였던 고영주 검사는 공소보류 처분 승인을 요청했다. '공소보류'란 국보법 위반 피의자의 범죄 혐의가 충분하더라도 범행동기와 결과, 범행후 정황 등을 헤아려 검사가 공소제기를 보류하는 것을 말한다.
고영주 검사는 '공안사범 공소보류 처분 승인 품신'에서 "범증은 충분하나 죄과를 깊이 뉘우쳐 전향하고 간첩 서성수를 검거하는 데 기여한 공이 크기 때문"이라고 기재했지만, '모국 유학생 간첩 혐의'를 받았던 김씨가 공소보류 처분을 받은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를 보안사에 강제근무시키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다.
김씨는 84년 1월 1일부터 보안사 대공처(3처) 수사과 소속 6급 군무원으로 임용됐다. 그는 대공처 수사지도계 첩보분석반에게 일하며 주로 첩보분석과 통역을 맡았다. 기무사 존안 인사기록카드에는 '사령부 3처 소속. 84. 1. 1. 6급 임용. 84.1.4 3처 수사관 보직.86. 1. 31. 면직(의원)'이라고 기재돼 있다.
당시 보안사 수사관이었던 이아무개씨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김씨의 보안사 강제근무 배경을 이렇게 해명했다.
"당시 김용성 계장이 한학동(재일한국학생동맹) 관련자 등을 수사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재일사건 관련 통․번역이 필요해서 김병진을 공소보류한 후 보안사에 근무토록 제안하고, 과장님, 처장님 등과 협의해서 결정했다."또다른 수사관 최아무개씨도 "(주된 업무는) 일본 관계 첩보 분석과 통․번역이었다"며 "김용성 당시 수사2계장이 의욕을 가지고 추진했던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수사2계장이었던 김용성씨는 진실화해위의 두 차례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김병진씨가 보안사에 근무하도록 강요했던 그는 지난해 12월 이후 출국해 현재 미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진씨는 "보안사에서 내 업무는 첩보분석이었고, 대공처 수사과 수사1계 내근직 첩보분석반이 내 소속이었다"며 "예하 보안부대에서 올라오는 첩보를 분석하거나 때때로 일본어 문서 번역, 통역, 도청테이프 번역 일을 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88년 <보안사> 펴낸 뒤 입국금지 당해... "5공청문회 증언 막으려고"김씨의 부인 강영미씨는 당시 "보안사에 근무하면 차라리 이혼을 하겠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보안사 근무를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월 14만원을 받으며 84년 1월부터 86년 1월까지 보안사에서 근무했다.
김씨는 2년여 동안 여러 건의 재일교포 간첩수사와 고문장면을 직접 보았다. 보안사는 재일교포 유학생들을 간첩혐의로 불법구금하고, 폭행하고, 전기고문을 가했다.
김씨는 "서울대와 연세대 교포 유학생 대상 간첩조작 계획인 '연서계획'에 따라 수사3계에서 간첩사건을 조작했다"며 "재일교포 사업가인 채아무개씨가 수사2계 직원으로부터 구타당하고 오줌싸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둘째 아이의 출산을 핑계로 퇴직을 신청했고, 퇴직이 허용된 직후인 86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목격한 '80년대 보안사의 실체'는 88년 발행된 <보안사>(소나무)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아사히신문> 논픽션 수상작이었던 <보안사>는 88년 6월 일본에서 처음 발간됐고, 두달 뒤 소나무 출판사에서 한국어로 번역돼 출판되었다. <보안사>는 보안사에서 직접 근무했던 사람이 80년대 무소불위의 조직이자 '5공화국의 산실'인 보안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보안사> 출판은 출판사 압수수색, 8000부 압수, 출판사 사장 지명수배, 직원 2명 연행 등의 '수난'으로 이어졌다. 또 저자인 김씨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중지당했다.
김씨는 지난 2004년 <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당국에서 자신을 입국금지시킨 이유와 관련 "겉으론 <보안사> 출판 때문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며 "88년 5공청문회 증인으로 서는 걸 방해하기 위해 기소중지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입국조차 금지당했던 김씨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인 2000년 5월에서야 고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86년 2월 보따리 하나만 들고 황급히 일본으로 출국한 지 15년 만이었다.
진실위, '인권침해 진실규명' 결정... "'과거사 청산운동'을 펼쳐야"그리고 24년 만인 지난 1일 진실화해위로부터 "국가는 보안사가 민간인 신분의 김씨를 연행해 불법구금과 가혹행위를 가한 점과 피의사실 공포로 신청인과 가족, 다수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침해한 점, 회유와 협박으로 김씨를 보안사에 근무하도록 강요한 점 등에 대하여 김씨 및 관련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았다.
지난 12일 한국에 들어온 김씨는 "기무사를 방문해 기무사령관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은 심정"이라며 "조만간 군의문사위 활동도 끝나고 진실화해위원장이 보수 인사로 바뀌었는데 다시 '과거사 청산운동'을 펼쳐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공유하기
간첩 혐의 유학생 어떻게 보안사에서 일하게 됐나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