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리는 지난해 경기도에서는 처음으로 '문화지구'로 지정되었습니다. 행정적 지원과 규제가 뒤 따를 이 지정은 기대와 우려가 동반되는 변화입니다.
이안수
낭만주의자들의 파티헤이리주민들은 세밑에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기로 한 약속을 되새기는 자리를 갖습니다. 지난 12월 29일에도 '2009 헤이리 회원 송년회'라는 이름으로 지난 한해의 노력들에 대해 칭찬하고 마뜩찮은 결과에 대해 위로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가장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이런 큰일들에는 번거롭고 손쓸 일이 많지요. 이런 일들은 마을 자치기구의 장인 촌장을 중심으로 각 마을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를 합니다.
올해에는 그 준비과정에서 더욱 흐뭇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수년간은 마을 기금으로 외식업체에 음식준비를 맡겨 송년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기백만원이 소요되는 비용입니다. 작년에는 강복영 촌장님이 헤이리에서 레스토랑을 하는 공간들에게 부탁을 드려 한 접시씩 음식을 기부 받고 파티플래너가 그것들을 조직하도록 했습니다.
올해 회원자치위원회의 준비회의에서 저는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마을의 일은 그 준비조차도 마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중요함으로 마을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한 가지씩을 기부하도록 하지요. 한 접시의 요리나 파티장을 장식하는데 필요한 노동력, 회원들과 나눌 상품, 혹은 재능 있는 사람들의 공연 기부 등 유무형의 모든 것을 함께 모아서 순수한 회원들의 노력으로 파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아끼는 경제적 효과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회원들의 자율적 기부를 전제로 한 저의 제의는 상당히 불확실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자율성은 어떤 결과를 얻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파티 당일에 촌장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60집 이상이 음식준비에 참여했어요. 어떤 마을에서는 단체로 함께 준비한 곳도 있어요."
과연 파티장에는 어느 해보다도 푸짐하고 다양한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식물감각을 운영하는 마숙현 회원께서는 연어요리를, 스페인 요리를 주로 하는 엘빠띠오의 이재영 회원은 닭고기그라탕을, 라임트리의 공영석 사모님은 텃밭에서 직접 농사지은 늙은 호박을 쑤운 호박죽을, 김치 담그는 솜씨가 비범한 윤도현씨의 어머님은 총각김치를, 가을이네의 진영효 선생님은 바닷가의 지인에게 부탁해서 싱싱한 생굴을 준비해주었습니다.
벚나무골에서는 함께 족발을, 마을의 동호인 그룹인 밸리댄스팀에서는 오징어회를 카메레타의 황인용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은 막걸리로 주민들의 화합에 동참했습니다.
파티장의 반코팅빨간면장갑이번 파티의 드레드 코드인 레드에 맞추어 성장을 한 주민들이 모이고 이정호 이사장님이 헤이리의 지난해를 반추하고 주민들의 이상을 향한 인내에 존경의 머리를 숙였습니다.
공연프로그램에서는 이끼집의 이소운이 무대에 올라 놀라운 마술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소운이는 평소 개구쟁이 어린이의 모습이었지만 스스로 마술에 흥미를 느껴 인터넷으로 그 기법을 배우고 마술도구들을 사모아 이제 전문마술사의 솜씨를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올해에는 특별한 오케스트라를 초청했습니다. '홈스쿨러 하늘소리'입니다. 서울 경기지역의 홈스쿨가족이 모여 2006년에 창단된 초·중·고등 또래의 청소년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입니다. 미국의 홈스쿨 가정인 윌링John Willing가족의 한국 이주가 창단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헤이리는 공교육의 대로를 가는 대신 오솔길의 험로를 택해 개성적인 미래를 개척하고 있는 이 홈스쿨러하늘소리 오케스트라에게도 헤이리에서의 연주가 새로운 경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민들은 어린 청소년들의 정성어린 연주에 아낌없는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소프라노 신숙경 선생님도 아름다운 선율로 이 파티에 동참했습니다. 레온카발로Ruggiero Leoncavallo의 이태리 가곡 'Mattinata 아침의 노래'가 헤이리의 밤을 더욱 낭만스럽게 했습니다.
그동안 두문불출 하루 10시간 이상씩, '역사사랑방'의 헤이리리 집필실에서 저작에만 몰두하셨던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께서도 모습을 보이고, 바쁜 강의 탓에 통 커뮤니티에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가을이 엄마의 화사한 웃음도 파티장에서 만날 수 있었고, 출판단지의 망년회에 겹친 탓에 늦어진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님 부부도 늦은 밤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새로 이사 온 문철배 부부도 한복으로 곱게 멋 낸 모습으로 헤이리에서의 첫 파티를 경험했습니다.
레드의 드레스 코드를 맞춘 주민들의 아이디어도 기발했습니다. 흰 셔츠에 빨간 스카프를 두른 소원이 아빠, 붉은 큼직한 꽃 코사지를 각각 가슴과 어깨에 단 천호균 사장 부부, 무엇보다도 이경림 박사의 작업용 빨간 면장갑이 압권이었습니다.
웃을 날을 위해 박수 가진 것을 나누는 것에도 한 마음이었습니다. 터치아트의 서일하 회원, 꿈꾸는 상자의 김성룡 회원, 동화나라의 정병규 회원, 통속과 한적의 성미나 회원 등은 책을, 테라의 이은미, 홍순정 작가와 포네티브스테이스의 한영실 작가, 소금항아리의 이영미 작가 그리고 취림헌의 강복영 작가는 각각 자신의 작품을, 또한 음악 CD와 와인들을 내놓은 회원도 적지않았습니다. 이것들은 추첨을 통해 파티 참가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어떤 개인도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면 방황이 시작됩니다. 헤이리 공동체는 아직 가야 할 길이 아득합니다. 건축을 마무리 지은 회원과 헤이리로 이주한 회원은 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공간운영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새 건축 회원들은 그나마 입장료 수익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어린이시설에 자꾸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공통된 목표의식이 강했던 기존 회원들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원에서 탈퇴하면서 그 택지를 물려받은 새로운 회원들이 기존의 맹약에 따른 각종 불이익(엄격한 건축지침과 업종제한, 공동체의 이익을 앞세운, 개인의 재산권행사와 권리를 제한하는 정관)에 반기를 들기도 합니다.
유휴 공간은 임대를 할 수 밖에 없고 임차인은 장기적인 목표보다 임대기간 안에 수익을 낼 수 있는 업종을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헤이리의 목표와 불일치할 때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고객들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한 간판과 현수막, 매표소의 설치 등이 헤이리의 엄격한 시각 광고물 제한 지침과 충돌하기도 합니다. 더 좋은 예술축제의 기획과 예술에 소양을 가진 더 많은 창작인들에게 예술 창작의 기름진 터전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지만 개인 공간의 운영에도 힘겨운 회원들의 쌈지돈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헤이리를 부동산적인 가치로만 접근하는 사람들을 막아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땅을 사는데도 사람을 심사하느냐'는 외부의 곱지 않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이 공동체 이상을 흩어버리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돈을 가진 어떤 사람도 헤이리를 사들일 수 있다면 헤이리는 곧 회복할 수 없는 상업주의의 치열한 각축장이 될 것이 뻔 한 노릇입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헤이리의 땅값은 헤이리 밖, 인근지역의 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부동산 투자가치로만 헤이리에 관심을 보인다면 오판입니다. 투자자들의 주 관심사인 환금성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각자의 필요와 특별한 기호에 맞추어 건축한 건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이고 비효율적인 건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헤이리의 정관을 만족시키면서 그 건물을 인수할 자금을 가진 사람을 찾는 일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헤이리 공동체의 앞길을 막고 있는 바위들입니다.
예술을 위해 건배 그리고 모두의 예술적 삶을 위해 건배!하지만 '헤이리'라는 인위적으로 조직되고 조성된 '헤이리 방식'의 예술공동체는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형태입니다. 지난해 초 예일대 shameem black 교수님은 모티프원에서 머물며 남북의 첨예한 군사갈등지역에서 '예술마을헤이리'가 그리고 예술이 어떻게 그 갈등의 완화에 기여할 수 있을 지를 연구했습니다. 이웃한 중국과 일본은 물론, 구미각국의 예술경영자들은 헤이리의 예술행위의 허브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고 해외의 언론들도 그 점에 동조하는 기사를 싣곤 합니다. 또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헤이리를 답사하는 발걸음도 여전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들의 지역에 개성적이고 예술적인 마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헤이리의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사례들까지도 제2의 헤이리를 꿈꾸고 있는 분들에게 에둘러 가는 발품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는 값진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은 압축성장시절의 어쩔 수 없는 천편일률의 아파트 단지개념의 주거형태나 커뮤니티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마을들의 나라로 회귀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송년회는 같은 밥상을 나누면서 헤이리가 당면한 장애물들을 어떻게 넘고 비켜가야할 지에 대해 서로를 위로하고 지혜를 모으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무국으로부터 지난 일 년간의 헤이리의 발자취를 회원들께 슬라이드쇼로 보여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하루 종일 지난 일 년간 사진으로 기록한 수십만 장의 헤이리의 삶 중에서 즐거운 기억들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을 위주로 편집했습니다. 좋은 기억은 명년의 어려움을 건너는 가장 큰 에너지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서두의 제 말을 수정하고 싶습니다. '다사다복多事多福했던 한 해'라고……. ' 여러 힘겨운 일로 어려웠던 한 해'라는 이미지보다 '여러 행복한 일로 즐거웠던 한 해'로 지난해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또한 달리 보면 지난해의 다양한 일들이 당장은 어려움이지만 미래에 다복의 밑거름일 것입니다. 올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공동체'의 싹에 더욱 기운을 북돋우는 덧거름을 수북이 주는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제가 살아본 헤이리는 '담 높은 부자들의 동네'가 아니라 '담조차 없고, 은행 부채만 높은 탐미에 몸 바치는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들의 동네'에 더 가깝습니다.
"예술을 위해 건배 그리고 모두의 예술적 삶을 위해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