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엔 중혼(重婚) 금지규정이 있지만, 법률상 배우자가 집을 나가 행방불명돼 사실상 이혼상태에 이르러 다른 사람과 새살림을 차린 경우 비록 '중혼적 사실혼관계' 일지라도 법률혼에 준하는 법적 보호를 해줄 필요가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L(46·여)씨는 2001년 1월 남편이 집을 나가 행방불명되자, K(43)씨와 2003년 1월부터 동거하면서 방에 결혼사진을 걸어두는 등 사실상의 혼인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던 중 L씨는 2005년 11월 K씨 소유의 승용차를 운행하다 충남 보령시의 한 도로에서 무등록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C씨를 치어 두개골 골절 등의 중상을 입혔다.
이에 L씨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K씨가 '법률상 배우자 또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가 사고를 낸 경우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부부운전자 특별약관이 포함된 자동차보험에 가입한 점을 들어 D화재보험에 C씨에게 보험금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D화재보험은 L씨가 행방불명된 남편과 혼인신고가 돼 있음을 들어 K씨와의 사실혼관계를 부인하며 보험사고 처리를 거절했다.
결국 D화재보험은 이 사고를 무보험자동차에 의한 사고로 간주해 보험약정에 따라 C씨에게 보험금 4918만 원을 지급한 뒤, 정부가 운영하는 무보험자동차상해담보 분담금 1508만 원을 지급받았다.
이후 D화재보험은 L씨는 운전자로서, K씨는 가해자동차의 주인으로서 피해자 C씨에 대해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며 지급한 보험금에서 분담금을 뺀 341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1심, 중혼 인정...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해야
1심인 대전지법 홍성지원 민사1단독 김동현 판사는 2008년 12월 D보험회사가 L씨와 K씨를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김 판사는 "원고는 K씨와 L씨를 사실혼관계로 인정해 보험사고로 처리한다 하더라도 하등의 불리함이 없고, 사실혼의 보호범위에 관해 사안에 따라 다소간 차이를 둘 수 있을지언정 L씨가 K씨 이외의 다른 사람과 법률혼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현재의 사실혼관계를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은 지나친 형식논리에 불과하다"며 "따라서 이 사건 교통사고는 보험사고로 간주해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법률상 혼인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실혼 인정 못해"
반면 항소심인 대전지법 제3민사부(재판장 김양규 부장판사)는 지난해 7월 원고 패소 판결한 1심을 깨고, "L씨와 K씨는 원고에게 3410만 원을 지급하라"며 D화재보험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L씨가 법률상 혼인관계에 있는 남편과 혼인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이중으로 K씨와 실질적인 혼인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사실혼으로 인정해 법률혼에 준하는 보호를 해 줄 수는 없으므로, L씨와 K씨 사이에 법률상 보호받을 수 있는 적법한 사실혼관계가 성립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법률상의 배우자가 있는 자가 혼인관계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다른 사람과 사실혼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통상적인 경우가 아닌 예외적인 경우로서 보험자(보험설계사 포함)가 이런 예외적인 경우까지 예상해 '부부한정운전 특별약관상의 사실혼관계의 배우자에 중혼적 사실혼관계에 있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법 "중혼에 해당하는 혼인도 취소하기 전까지는 유효하게 존속"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제1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D화재보험이 L씨와 동거 중인 K씨를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냈다고 5일 밝혔다.
재판부는 "사실혼은 당사자 사이에 혼인의사가 있고 사회관념상 부부공동생활을 인정할 만한 혼인생활의 실체가 있으면 성립하는 것"이라며 "비록 우리 법제가 일부일처주의를 채택해 중혼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고 있더라도, 이를 위반한 때를 혼인무효 사유로 규정하지 않고 단지 혼인취소 사유로만 규정하고 있는 까닭에 중혼에 해당하는 혼인이라도 취소하기 전까지는 유효하게 존속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는 중혼적 사실혼이라고 해서 달리 볼 것이 아니다"며 "비록 중혼적 사실혼관계 일지라도 이전의 법률혼이 사실상 이혼상태에 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법률혼에 준하는 보호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L씨의 법률상의 배우자가 집을 나가 행방불명됨으로써 그들의 혼인은 사실상 이혼상태에 이르렀고, 피고들은 부부공동생활을 인정할 만한 혼인의 실체를 갖춘 사실혼관계에 있어, 단순히 L씨가 중혼적 사실혼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법률혼에 준하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해서 특별약관상의 '사실혼관계에 있는 배우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특별약관의 해석을 그르친 것"이라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