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록 편집위원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
이기원
20대엔 중고등학교를 세운 교육자로서, 30대 이후엔 협동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말년에는 한살림 운동 등 생명 운동을 펼쳐나간 생명사상가로서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삶을 사셨지만 당신의 삶에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애정, 그리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을 제외하곤 원주를 떠나지 않으셨지만, 변방에서 전체를 조망하며 우리 민족과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시고 온 삶을 바쳐 조용히 실천해 오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리영희, 김종철, 박재일, 김지하, 이현주, 김민기, 김성동, 이병철, 유홍준, 이철수 등과 같은 시대의 지식인들이 무위당 선생님을 찾아오거나 곁에 계셨습니다.
후학들은 무위당 선생님을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는 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큰 고목나무 같은 분이셨다고 보면 됩니다. 큰 나무엔 새도 날아오고 온갖 곤충들의 삶터가 되기도 하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쉬게 해 주기도 하지요. 때론 벌레가 끼기도 하지만 뭇 생명에게 가리지 않고 품을 내어 주지요. 또 하나 서화가로서의 무위당 선생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그 친구인 차강 박기정 선생한테 서화를 배운 무위당 선생님은 사람의 얼굴을 닮은 의인란(擬人蘭)으로 유명하며 미려한 예서(隸書) 글씨와 조형미 넘치는 한글 서예로 유명합니다.
글씨와 그림은 주로 지인들이나 후학들에게 나눠주셨는데, 몇 번의 개인전을 열어 그 수익금으로 민주화 운동이나 생명운동과 관련된 단체들을 지원하시기도 했습니다. 청강(靑江), 무위당(無爲堂) 등의 호를 쓰셨고, 스스로를 낮추는 뜻으로 일속자(一粟子, 조한알)이라는 호를 쓰시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