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다나카 전 일본 총리의 구속은 한국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할 정도로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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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검찰도 2003~2004년 대선자금 수사 국면에서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정치권 수사를 하며 새롭게 태어날 기회를 얻었지만, 그 이후 스스로 권력화됨으로써 개혁의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다나카 전 총리와 벌인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 검찰도 이후에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다.
체포된 다음달 보석으로 풀려난 다나카는 같은 해 12월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거뜬히 당선됐고, 이후에도 세 번이나 더 당선됐다. 1982년 11월 출범한 나카소네 내각은 다나카파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탓에 언론으로부터 '다나카소네 내각'으로 명명됐다.
정치적으로 재기한 다나카가 검찰에 영향을 끼치는 법무상 자리에 자신의 측근을 내려보내는 통에 검찰의 권력 감시 기능도 갈수록 빛을 잃었다.
"정치는 힘, 힘은 수, 수는 돈"이라는 다나카의 정치철학은 그가 1990년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자민당을 지배했다.
전·현직 총리가 모두 연루된 '리쿠르트 스캔들'이 록히드 사건 12년 후에야 터진 것도 일본 검찰이 그동안 '부패와의 전쟁'에서 그만큼 무력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검찰은 왜 경찰의 공산당 간부 도청을 덮었나?1986년 11월의 공산당 간부집 도청 사건도 "정치적 고려 없이 시시비비를 밝힌다"는 일본 검찰이 표리부동한 처신을 했다는 점에서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해 11월 27일 공산당 국제부장 도가타 야스오 자택 옆 전봇대에서 전화를 엿듣는 목적의 도청기가 발견된 것이 사건의 발단.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 결과, 공안경찰 3명이 도청기를 설치했고 '사쿠라 부대'라는 경찰청 비밀조직이 배후임이 드러났다.
경찰이 공산당 간부의 위법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도청이라는 불법 수단을 사용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경찰 조직의 특성상 수뇌부의 지시 또는 허가 없이 말단 경찰이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것도 정황상 말이 안 됐다.
그러나 이듬해 8월 이토 시게키 검찰총장은 "다시는 위법 수사를 하지 않겠다"는 경찰청의 서약을 받고 3명에 대한 불기소를 지시했다. 이토 총장은 검찰 공안부가 사건을 수사할 경우 공안경찰과 유착된 공안부가 한통속이 되어 사건을 덮을 것을 우려해서 일부러 특수부에 사건을 넘겼는데, 막상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자 사건을 덮으려고 한 것이다.
훗날 이토 총장은 유고집에서 경찰 최상층부까지 수사를 확대할 경우 "치안상 곤란한 사태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1만1천 직원을 둔 검찰이 전국 26만에 달하는 경찰 조직의 협조를 받지 않고는 공안 사건은 물론, 일반 형사사건도 제대로 수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사건의 주임검사도 "경찰관들을 기소하면 앞으로 30년간 경찰의 협조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말을 기자들에게 흘리고 다녔지만, 검찰이 조직의 편의 때문에 법치를 무시했다는 비판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1988년 도쿄지검 특수부가 여야 정치인들이 두루 연루된 '리쿠르트 스캔들' 수사에 사활을 건 것도 땅에 떨어진 검찰의 공신력을 찾으려는 목적이 강했다.
리크루트로부터 거액의 정치헌금을 받은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1989년 4월 25일 퇴진 성명을 발표했지만, 또 한 명의 '주역'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자민당을 탈당했다가 2년 만에 복당했다.
검찰은 "비서가 모든 일을 다했다"고 떠넘기는 나카소네를 결국 기소하지 못했는데, 정치인 수사의 성패가 외압에 버티느냐보다는 검찰 본연의 실력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검찰이 리크루트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기 위해 장장 9개월간 들인 노력을 아는 일본 국민들은 이들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운송회사 도쿄사가와규빈으로부터 5억 엔의 정치자금을 받은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를 1993년 3월 6일 구속시킨 것도 일본 검찰에게 그다지 만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가네마루는 단 한 번도 총리를 맡은 적은 없지만, 자민당 최대계파 다케시다파의 영수라는 점에서 검찰이 쉽게 상대할 인물이 아니었다.
가네마루는 처음부터 5억 엔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관련자들이 가네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입을 맞추고 가네마루가 검찰 출두를 거부하는 바람에 수사는 벽에 부딪혔다. 유죄 입증을 자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검찰이 그를 약식기소하고, 사건이 벌금 20만 엔으로 종결되려 하자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가네마루의 사무소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도 시도하지 않은 검찰에 화살이 집중된 것은 불문가지. 절치부심하던 검찰은 이듬해 2월 국세청 첩보를 단서로 그의 탈세 혐의를 추궁한 끝에 3월 7일 그의 사무소에서 비밀금고를 찾아냈다.
그가 '검은 돈'으로 쓴 60억 엔의 무기명채권과 다량의 금괴가 쏟아져 나오자 일본 열도의 민심은 폭발했다. 검찰에 기소된 그는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사망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 검찰이 항상 영광의 자리만 지켜온 것은 아니다.
권력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여당 실세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는 수모도 겪었고, 부실 수사로는 유죄를 받아낼 수 없음을 직감하고 기소를 포기한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 검찰이 이러한 부침을 겪으면서 국민들로부터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국가기관'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분명하다.
최근 오자와 간사장을 겨냥한 수사는 일본 검찰에 새로운 시험대라고 할 수 있다.
"가스미가세키(관료집단)를 대표하는 검찰이 관료 개혁에 나선 하토야마 정권을 길들이려고 한다"는 게 집권 민주당의 일반적인 정서인데, 검찰은 검찰대로 대부분의 정치인 수사에서 연전연승해온 전적을 자랑하고 있다.
검찰과 '17년 법정 공방'을 벌인 다나카 전 총리조차 1976년 체포 당시에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가 완벽하고 특수부가 수사한 사건이 무죄 판결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고 상대의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 기소권을 남용하다가 낭패를 보는 한국 검찰이 그나마 일본 검찰에 본받을 게 있다면, 완벽한 수사가 아니라면 과감히 기소를 포기하는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검사장을 지낸 한 변호사는 "우리나라 검사들이 일본에 비해 수사능력이 절대로 뒤처지는 것은 아닌데, 정치권의 압박과 여론의 등쌀, 너무 잦은 검찰 인사 등의 외적 환경에 너무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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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없으면 불기소" 일본검찰 이렇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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