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없으면 불기소" 일본검찰 이렇게 다르다

'살아있는 권력'과 맞서는 도쿄지검 특수부

등록 2010.01.21 09:42수정 2010.01.2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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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행동과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현 정권에 부역한 정치 검찰의 책임자 처벌과 자기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미디어행동과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현 정권에 부역한 정치 검찰의 책임자 처벌과 자기성찰을 촉구하고 있다.유성호

MBC <PD수첩> 제작진과 전교조 시국선언 교사들을 무리하게 기소했다가 법정에서 패소한 검찰의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효성 비자금과 한상률 전 국세청장 의혹 등 현 정권에 불리한 사건을 덮기에 급급하고 부당한 권력 행사에 저항한 이들을 억압해온 검찰의 최근 모습들을 생각하면 사필귀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럴 때 으레 나오는 말이 "일본 검찰은 안 그러는데..."라는 넋두리다.

1970년대부터 정계 실력자들을 무너뜨린 3대 대형사건 수사로 명성을 떨친 도쿄지검 특수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미 군정 시절에 일본군 간부들의 은닉 군수물자 수사를 전담한 인타이조 사건 수사부를 모태로 1949년 5월 14일 설립된 기구로, 1954년 내각 법무상의 지휘권 발동으로 여당 실세를 구속하지 못한 이른바 '조선의혹' 사건으로 '권력의 시녀'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3대 사건 수사로 국민의 신망을 다시 얻게 됐다.

3대 사건이란 미 군수업체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체포한 1976년 록히드 사건,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등 여야 핵심인사들이 상장 전 미공개주식을 불법 양도받은 1988년의 리쿠르트 사건, 화물운송사로부터 5억 엔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고 탈세까지 한 혐의로 자민당 실세 가네마루 신을 구속시킨 사가와규빈 사건을 말한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최근에는 집권 민주당 간사장을 맡고 있는 오자와 이치로의 정치자금 수사에 나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강하게 반발하던 오자와 간사장도 7월 참의원 선거에 악영향을 우려한 나머지 검찰 수사를 받기로 태도를 바꾼 상태다.


그러나 "살아있는 권력의 심장을 향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다"는 일본 검찰에 대해 다소 부풀려지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도 없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검찰의 '신화'를 벗기는 작업은 한국 검찰의 '진짜 문제점'을 알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일본 검찰이 집권당 보스를 '손쉽게' 구속할 수 있었던 비결


 작년 12월 12일에 방한한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간사장. 최근 일본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로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다.
작년 12월 12일에 방한한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간사장. 최근 일본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로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다.일본 민주당 홈페이지
도쿄지검 특수부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외환법 위반 혐의로 체포한 1976년 7월 27일은 일본 사법사에서 '검찰이 다시 태어난 날'로 기억된다.

그해 2월 18일 검찰 수뇌회의에서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마음껏 수사하라"고 말한 후세 다케시 검찰총장의 말은 '권력의 외풍에 온몸으로 맞서는 초인 검찰'의 이미지를 낳았고, 사건 주임검사 요시나가 유스케의 활약도 여러 권의 책으로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도쿄지검 특수부가 만약 정치권으로부터 수사 중단 등의 압력을 받았을 때 이를 쉽사리 뿌리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정치권의 압력이 전혀 없는 시대 상황이 도쿄지검 특수부의 운신 폭을 넓혀준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자민당 다나카파는 법무상 이나바 오사무씨가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을 발동하지 않은 점을 검찰의 기소 이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일본 검찰청법 14조는 "법무상은 개개 사인의 취조 또는 처분에 대해 검찰총장의 신분으로 지휘할 수 있다"고 되어 있고, 1954년 검찰이 사토 에이사쿠 자유당(자민당의 전신) 간사장을 수뢰혐의로 구속하려고 할 때 당시 법무상이 지휘권을 행사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 언론인 우오즈미 아키라가 1997년에 쓴 <파워검찰 :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들>에 따르면, 미키 다케오 총리는 "전직 총리 체포를 허가해 달라"는 법무성 형사국장의 요청에 "그래, 그래"하면서 "아, 그런가" 할 뿐이었고, 이나바 법무상도 "허가하고 말고가 있나. 믿겠소"라고 검찰에 힘을 실어주었다.

미키 총리는 다나카파의 도움 없이 자민당 총재(일본 총리)가 됐기 때문에 자신과 상관없는 다나카를 애써 보호해줄 이유가 없었고, 심지어 록히드 사건을 당내 경쟁자 다나카를 제압하는 데 활용하려고 한 정황도 있다는 게 당시 언론의 분석이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다나카파가 다른 파벌들과 합세해 미키 총리의 퇴진을 추진하려고 했던 것(<요미우리 신문> 1976년 5월 13일 1면 보도)도 미키 총리에 대한 다나카파의 불신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총리-법무상-검찰총장-도쿄지검 라인에 다나카의 영향력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고, 도쿄지검 특수부는 정치적 외압을 걱정할 필요 없이 여당 최대계파 보스에 대한 수사를 착착 진행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마음껏 수사하라"고 말한 후세 다케시 검찰총장의 말도 후세에 곡해된 셈이다.

검찰총장은 "수사가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검찰이 망설인다면 앞으로 20년간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가미야 히사오 도쿄고검 검사장의 말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는데, 그 당시 일본 검찰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외압이 아니라 '록히드 파일'을 가진 미 연방 증권거래위원회로부터 수사 자료를 순순히 넘겨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록히드 사건이 미·일 두 나라에 걸쳐 있는 데다가 증거 인멸도 상당히 이뤄져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검사들은 수사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일본 검찰은 미국이 넘겨준 자료에서 다나카 전 총리에게 뇌물이 넘어간 사실을 처음 확인하고, 그의 측근들에게 수사망을 좁힐 수 있었다.)

우오즈미 아키라는 저서에서 "다나카의 입장에서 최대 불운은 정적인 미키 다케오 정권 하에서 발각되었다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일선 검사들은 이상적인 수사 환경의 혜택으로 자신들이 가진 역량을 기대 이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전후 의혹 사건사에서 이 록히드 사건만큼 수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최종 목표에 도달한 경우는 거의 없다."

 1976년 다나카 전 일본 총리의 구속은 한국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할 정도로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1976년 다나카 전 일본 총리의 구속은 한국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할 정도로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중앙일보 PDF

우리 검찰도 2003~2004년 대선자금 수사 국면에서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정치권 수사를 하며 새롭게 태어날 기회를 얻었지만, 그 이후 스스로 권력화됨으로써 개혁의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다나카 전 총리와 벌인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 검찰도 이후에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다.

체포된 다음달 보석으로 풀려난 다나카는 같은 해 12월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거뜬히 당선됐고, 이후에도 세 번이나 더 당선됐다. 1982년 11월 출범한 나카소네 내각은 다나카파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탓에 언론으로부터 '다나카소네 내각'으로 명명됐다.

정치적으로 재기한 다나카가 검찰에 영향을 끼치는 법무상 자리에 자신의 측근을 내려보내는 통에 검찰의 권력 감시 기능도 갈수록 빛을 잃었다.

"정치는 힘, 힘은 수, 수는 돈"이라는 다나카의 정치철학은 그가 1990년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자민당을 지배했다.

전·현직 총리가 모두 연루된 '리쿠르트 스캔들'이 록히드 사건 12년 후에야 터진 것도 일본 검찰이 그동안 '부패와의 전쟁'에서 그만큼 무력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검찰은 왜 경찰의 공산당 간부 도청을 덮었나?

1986년 11월의 공산당 간부집 도청 사건도 "정치적 고려 없이 시시비비를 밝힌다"는 일본 검찰이 표리부동한 처신을 했다는 점에서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해 11월 27일 공산당 국제부장 도가타 야스오 자택 옆 전봇대에서 전화를 엿듣는 목적의 도청기가 발견된 것이 사건의 발단.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 결과, 공안경찰 3명이 도청기를 설치했고 '사쿠라 부대'라는 경찰청 비밀조직이 배후임이 드러났다.

경찰이 공산당 간부의 위법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도청이라는 불법 수단을 사용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경찰 조직의 특성상 수뇌부의 지시 또는 허가 없이 말단 경찰이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것도 정황상 말이 안 됐다.

그러나 이듬해 8월 이토 시게키 검찰총장은 "다시는 위법 수사를 하지 않겠다"는 경찰청의 서약을 받고 3명에 대한 불기소를 지시했다. 이토 총장은 검찰 공안부가 사건을 수사할 경우 공안경찰과 유착된 공안부가 한통속이 되어 사건을 덮을 것을 우려해서 일부러 특수부에 사건을 넘겼는데, 막상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자 사건을 덮으려고 한 것이다.

훗날 이토 총장은 유고집에서 경찰 최상층부까지 수사를 확대할 경우 "치안상 곤란한 사태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1만1천 직원을 둔 검찰이 전국 26만에 달하는 경찰 조직의 협조를 받지 않고는 공안 사건은 물론, 일반 형사사건도 제대로 수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사건의 주임검사도 "경찰관들을 기소하면 앞으로 30년간 경찰의 협조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 사정을 이해해달라"는 말을 기자들에게 흘리고 다녔지만, 검찰이 조직의 편의 때문에 법치를 무시했다는 비판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1988년 도쿄지검 특수부가 여야 정치인들이 두루 연루된 '리쿠르트 스캔들' 수사에 사활을 건 것도 땅에 떨어진 검찰의 공신력을 찾으려는 목적이 강했다.

리크루트로부터 거액의 정치헌금을 받은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1989년 4월 25일 퇴진 성명을 발표했지만, 또 한 명의 '주역'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자민당을 탈당했다가 2년 만에 복당했다.

검찰은 "비서가 모든 일을 다했다"고 떠넘기는 나카소네를 결국 기소하지 못했는데, 정치인 수사의 성패가 외압에 버티느냐보다는 검찰 본연의 실력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검찰이 리크루트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기 위해 장장 9개월간 들인 노력을 아는 일본 국민들은 이들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운송회사 도쿄사가와규빈으로부터 5억 엔의 정치자금을 받은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를 1993년 3월 6일 구속시킨 것도 일본 검찰에게 그다지 만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가네마루는 단 한 번도 총리를 맡은 적은 없지만, 자민당 최대계파 다케시다파의 영수라는 점에서 검찰이 쉽게 상대할 인물이 아니었다.

가네마루는 처음부터 5억 엔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관련자들이 가네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입을 맞추고 가네마루가 검찰 출두를 거부하는 바람에 수사는 벽에 부딪혔다. 유죄 입증을 자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검찰이 그를 약식기소하고, 사건이 벌금 20만 엔으로 종결되려 하자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가네마루의 사무소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도 시도하지 않은 검찰에 화살이 집중된 것은 불문가지. 절치부심하던 검찰은 이듬해 2월 국세청 첩보를 단서로 그의 탈세 혐의를 추궁한 끝에 3월 7일 그의 사무소에서 비밀금고를 찾아냈다.

그가 '검은 돈'으로 쓴 60억 엔의 무기명채권과 다량의 금괴가 쏟아져 나오자 일본 열도의 민심은 폭발했다. 검찰에 기소된 그는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사망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 검찰이 항상 영광의 자리만 지켜온 것은 아니다.

권력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여당 실세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는 수모도 겪었고, 부실 수사로는 유죄를 받아낼 수 없음을 직감하고 기소를 포기한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 검찰이 이러한 부침을 겪으면서 국민들로부터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국가기관'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분명하다.

최근 오자와 간사장을 겨냥한 수사는 일본 검찰에 새로운 시험대라고 할 수 있다.

"가스미가세키(관료집단)를 대표하는 검찰이 관료 개혁에 나선 하토야마 정권을 길들이려고 한다"는 게 집권 민주당의 일반적인 정서인데, 검찰은 검찰대로 대부분의 정치인 수사에서 연전연승해온 전적을 자랑하고 있다.

검찰과 '17년 법정 공방'을 벌인 다나카 전 총리조차 1976년 체포 당시에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가 완벽하고 특수부가 수사한 사건이 무죄 판결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고 상대의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 기소권을 남용하다가 낭패를 보는 한국 검찰이 그나마 일본 검찰에 본받을 게 있다면, 완벽한 수사가 아니라면 과감히 기소를 포기하는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검사장을 지낸 한 변호사는 "우리나라 검사들이 일본에 비해 수사능력이 절대로 뒤처지는 것은 아닌데, 정치권의 압박과 여론의 등쌀, 너무 잦은 검찰 인사 등의 외적 환경에 너무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자와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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