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에 공헌한 미쯔비시?

[나가사키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을 가다①] 미쯔비시 광업의 다카시마 탄광(上)

등록 2010.02.08 11:02수정 2010.02.0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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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 블루의 깊은 바다 물결을 따라 나가사키항 오하토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약 34분 정도 달리면, 다카시마(高島)에 도착한다.

걸어서 3시간이면 산책 삼아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고 고요한 섬. 이런 곳에 대체 뭐가 있을까 싶지만, 해수를 따뜻하게 데워 온욕을 즐길 수 있는 목욕탕도 있고, 해수욕장 및 낚시를 즐기기에 좋은 공원도 마련돼 있다. 또 나가사키 시에 의하면 나가사키와 일본의 근대화 유산과 탄광산업의 흔적도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섬으로부터 약 5km 달리면 하시마(端島)에 당도한다. 나가사키 시는 나가사키항 오하토 터미널로부터 가장 지척에 있는 세 개의 섬 이오지마(伊王島)-다카시마(高島)-하시마(端島)를 관광지로서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이오지마는 온천, 다카시마는 석탄자료관과 메이지-다이쇼-쇼와 시대 미쯔비시 기업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산책코스 겸 리조트를 즐길 수 있는 섬 그리고 하시마는 일본의 근대화와 명운을 함께 하며 번영하고 쇠락해간 마음 속의 고향 같은 섬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새겨져 있다.

다카시마의 역사는 미쯔비시의 역사 

이중에서도 다카시마와 하시마는 메이지 시대부터 미쯔비시 광업이 경영한 탄광섬으로 각각 1974년, 1986년 폐광하기까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태평양 전쟁 시대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관공서나 관광안내소뿐 아니라, 식당과 도서관, 상점가 등 시내 곳곳에 광범위하게 배치돼 있어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나가사키 국제관광 콘벤션 협회 제작의 도보여행 안내지 '나가사키 사루쿠 코스 지도-다카시마 일대' 편에 실린 타니시타 히데유키 다카시마 지역 진흥회 회장의 인터뷰를 보자.


"다카시마의 역사는 미쯔비시의 역사이기도 하며, 나가사키 경제의 일부를 담당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에너지 산업에 공헌했다." 이는 다카시마 지역민과 나가사키 시민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같은 도보여행 안내지에도 다카시마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와 일본의 근대화를 뒷받쳐 왔다", 하시마에 대해서는 "일본의 근대화를 지탱해온 해저탄광 섬"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현장에 있는 다양한 전시시설이나 안내판 설명, 관광안내서 등에서도 대동소이하다.


다카시마에 당도하면 곧바로 석탄자료관과 미쯔비시 재벌의 창립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의 동상이 눈에 띈다. 석탄자료관은 탄광 노동자들의 조합 사무실로 사용하던 건물을 폐광 후 자료관으로 조성해 다카시마 교육센터에서 관리하고 있다. 다카시마의 역사와 탄광 개발, 번영과 전성기를 거쳐 폐광에 이르기까지의 연표 및 시청각 자료와 함께, 탄광에서 사용했던 도구, 탄광의 구조 및 미쯔비시 기업의 문장(紋章), 노동현장의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다카시마 석탄자료관 내부. 미쯔비시와 다카시마의 역사 및 탄광 관련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다.
다카시마 석탄자료관 내부. 미쯔비시와 다카시마의 역사 및 탄광 관련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은옥

주목할 만한 점은 석탄자료관의 연표가 메이지 유신 이전인 에도시대(막부봉건시대,1695) 석탄을 처음 발견한 것으로 시작해 본격적인 발굴과 개업, 그리고 폐광의 1986년까지 꽤 오랜 시대를 꼼꼼히 서술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록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의적인 누락일까.

이 시대는 일본이 중국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 침략을 확대·강화하며, 미국과의 전쟁도 시작한 때이다. 그와 함께 전시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중국인 포로 및 조선인을 처음에는 '모집'이라는 명분에서 시작해, 점차 '관 알선'(할당 의무를 채워야만 하므로 결국 강제동원과 마찬가지), 강제연행의 수순을 밟아간 시대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과 대규모 강제징용· 노동 실시된 1939~1945년 누락된 연혁표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발행한 <원폭과 조선인 제2집>에서 미쯔비시 석탄 광업회사의 다카시마 광업소 직원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1940년 이전에도 상당수 이 섬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41년부터는 '노무자 모집이나 국민징용령', 즉 강제동원에 의하여 조선과 일본 각지에서 억지로 탄광에 끌려오기 시작했다. 동 직원은 "다카시마에 가장 광부들이 많았던 때가 5000명 이상이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조선인이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른바 '나가사키시 역사교육위원회'가 제작한 설명판의 '역사 누락'을 목격하면서 '역사 교육'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 노조 중에서도 탄광노조는 가장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온 것으로 평가받지만 다카시마에서 성장한 지역 출신의 어느 시민운동가에 따르면 "탄로는 전투적으로 사측과 싸우며 협상을 해나갔지만 미쯔비시라는 기업 전체에 대해서 타격을 가하는 공개적 비난활동을 하거나 기업의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의 부도덕성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석탄자료관을 나오면 건물 부지에 풀밭이 조성돼 있는데, 이곳에는 다카시마와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쌍둥이 같은 섬, 즉 동일한 미쯔비시 광업이 탄광을 경영한 하시마의 모형도가 전시되고 있다. 본래 섬의 이름이 '하시마'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사람들에겐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해져 있다. 마치 바다의 요새를 연상시키는 외관이, 당시 군함 '도사(土佐)'와 매추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군함도(軍艦島)'인데, 이제는 본명이자 행정명인 하시마보다는 별명으로 더 널리 불리우고 있다.

당시 강제동원 현장의 어느 곳이 덜 괴롭고 어느 곳이 더 가혹했는가를 비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간신히 살아남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이 살 곳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땅에도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겠거니 할 정도로 말이다. 하시마는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축도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므로 별도의 페이지를 할애하여 더 자세히 소개하는 기회를 갖기로 하겠다.

 나가사키시 다카시마에 세워진 미쯔비시 재벌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라고 소개되고 있었다.
나가사키시 다카시마에 세워진 미쯔비시 재벌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라고 소개되고 있었다. 전은옥

석탄 자료관에서 바다 쪽을  향해 몸을 돌리면 그곳에 미쯔비시 재벌의 창립자인 이와사키 야타로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기자의 다카시마 방문은 벌써 네 번째인데, 일본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첫번째 방문 당시에는 대체 누구이길래 이 작은 섬에 저런 동상이 서 있나 궁금해 했다. 물론 일본어를 읽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 한 의문을 풀 수도 없었다.

최근 다시 주목받는 미쯔비시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

이와사키 야타로는 한국으로 치면, 삼성이나 현대를 설립한 창업주 정도되는 인물이다. 가난한 하급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국가의 강력한 후원을 힘입어 미쯔비시를 재벌로 키워낸 인물로 일본 근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사키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 가문과 기업은 대대로 '미쯔비시는 국가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려왔다.

미쯔비시는 탄광과 조선소뿐 아니라 무기 제조에도 엄청나게 열을 올려 일본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전쟁으로 인해 세를 불린 만큼 전쟁이 격화될수록 뒤에서는 더 환호했을 것이 틀림없다. 스케일이나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힘의 면에서는 삼성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노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노조가 1989년 이후 '어용노조','사측에 타협적인 노조'라는 말을 들어온 지 오래지만, 일본은 복수노조를 허용하기 때문에 힘센 노조는 타협적일지 몰라도, 양심적인 노조도 분명 존재한다. 소수파이지만 말이다.  

나가사키에 있어서도 미쯔비시의 영향력은 나가사키의 역사와 나가사키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가사키 대학 교육학부의 후나고에 코이치 교수(舟越耿一)는 <나가사키에서 평화학을:ナガサキから平和学をする!>이라는 책에서 "나가사키는 미쯔비시 기업성에 둘러싸인 도시다. 미쯔비시를 정점으로 하여 차차 퍼진 중소영세기업이 연결되어 있는 경제구조가 있다", "나가사키는 미쯔비시 발양의 도시"라며, 과거 침략의 시대뿐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나가사키와 미쯔비시의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즉, 나가사키의 경제에서 미쯔비시는 포항의 포스코, 울산의 현대인 것이다.

 나가사키항으로부터 다카시마를 향해 달리는 고속선 위에서 촬영한 미쯔비시 중공 나가사키 조선소의 모습. 나가사키 시내에서는 어디를 가나 미쯔비시 중공의 조선소나 공장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나가사키항으로부터 다카시마를 향해 달리는 고속선 위에서 촬영한 미쯔비시 중공 나가사키 조선소의 모습. 나가사키 시내에서는 어디를 가나 미쯔비시 중공의 조선소나 공장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전은옥

최근 이와사키 야타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NHK대하 드라마 <료마전>이 바로 미쯔비시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의 시점에서 료마의 인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분차별이 심하고 부패한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에게 권력을 주는 한편, 서양의 군사기술을 배움과 동시에 의회와 헌법으로 국가를 기초해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자던 변혁의 시대, 일본인이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인물 1위로 뽑는 이른바 '막말의 지사, 영웅, 풍운아' 사키모토 료마와 함께 동업하고 협력했던 지기로서의 이와사키.

그의 동상 앞에 세워진 설명판에는 그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이와사키 야타로가 미쯔비시 기업을 세워 탄광이나 조선소를 통해 석탄과 군함이라는 양날의 날개로서 일본의 근대화와 전쟁, 세력 확장에 공헌한 인물이고, 다카시마와 하시마의 탄광도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섬이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이와사키가 다카시마 탄광을 인수하기 전에 탄광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의 별장터도 섬내에 있는데, 글로버 역시 일본에 서양문물을 전하고 무역과 사업을 통해 일본 근대화에 공헌한 인물로 시민들에게 친숙하며 사라받아온 인물이다. 나가사키 시의 대표적 관광지로 손꼽히는 글라바엔이 바로 이 글로버 등의 서양인들이 거주했던 서양주택들의 마을을 보존· 복원· 이전하여 공원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자칭 평화도시 나가사키의 딜레마

 미쯔비시 중공 나가사키 조선소 본사. 미쯔비시 중공은 전쟁이 끝난 현재도 군함, 어뢰, 어뢰발사장치 등을 나가사키에서 제조하고 있으며, 미쯔비시 중공 홈페이지에는 "일본 방위산업의 톱 메이커로서 전투기, 헬리콥터, 미사일, 어뢰, 함정, 전차 등을 개발?생산?지원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자기 선전을 하고 있다.
미쯔비시 중공 나가사키 조선소 본사. 미쯔비시 중공은 전쟁이 끝난 현재도 군함, 어뢰, 어뢰발사장치 등을 나가사키에서 제조하고 있으며, 미쯔비시 중공 홈페이지에는 "일본 방위산업의 톱 메이커로서 전투기, 헬리콥터, 미사일, 어뢰, 함정, 전차 등을 개발?생산?지원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자기 선전을 하고 있다. 전은옥

그러나 시내 유명관광지나 자료관, 기념관 등의 시설에서 너무도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근대화에 공헌'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위화감을 느낀다. '공헌'이라는 단어, 그리고 '근대화'라는 단어를 서술한 사람은 분명히 긍정적인 의미로서 사용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한 탄광이라는 것, 무기 기술 개발과 제작, 판매, 군수물자 이송 등 군수산업이라는 것은 결국 전쟁, 침략, 제국주의 팽창, 군사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탄광에서 나오는 석탄이 전쟁 수행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며 일본의 가정과 사회 곳곳에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었지만, 태평양 전쟁 하에서는 전쟁 수행을 위하여 폭압적으로 채탄량 증산에 열을 올렸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 노동자, 중국인 포로 강제동원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제 다카시마에 더 이상 탄광은 없다. 다카시마는 평범한 시골마을처럼 고즈넉하면서도 쓸쓸한 섬이 되었다. 탄광이 사라진 후 인구도 급감하고, 이웃섬 이오지마에 비하면 찾아오는 관광객의 수도 적은 편이다. 그래서 지자체 차원에서 독특한 생김새를 한 최상급 토마토, 풍력발전소, 낚시와 해수욕 등을 홍보해 관광객 유치에 힘쓰고 있다. 봄에는 산행, 여름에는 낚시와 해수욕, 가을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양, 겨울에는 별이 빛나는 밤이 다카시마 여행의 포인트라 한다.

코발트 빛 깊은 블루의 낙원을 꿈꾸는 섬. 탄광 시대의 번영을 그리워 하는 섬. 일본인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 낙원의 섬이 이제는 잊혀져버린 타국의 강제동원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귀신섬"이었음을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가사키가 진정으로 평화도시가 되고 싶다면 말이다.
#다카시마 탄광 #미쯔비시 광업 #미쯔비시 중공 #나가사키 #조선인 강제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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