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시마 석탄자료관 내부. 미쯔비시와 다카시마의 역사 및 탄광 관련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은옥
주목할 만한 점은 석탄자료관의 연표가 메이지 유신 이전인 에도시대(막부봉건시대,1695) 석탄을 처음 발견한 것으로 시작해 본격적인 발굴과 개업, 그리고 폐광의 1986년까지 꽤 오랜 시대를 꼼꼼히 서술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록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의적인 누락일까.
이 시대는 일본이 중국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 침략을 확대·강화하며, 미국과의 전쟁도 시작한 때이다. 그와 함께 전시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중국인 포로 및 조선인을 처음에는 '모집'이라는 명분에서 시작해, 점차 '관 알선'(할당 의무를 채워야만 하므로 결국 강제동원과 마찬가지), 강제연행의 수순을 밟아간 시대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과 대규모 강제징용· 노동 실시된 1939~1945년 누락된 연혁표'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발행한 <원폭과 조선인 제2집>에서 미쯔비시 석탄 광업회사의 다카시마 광업소 직원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1940년 이전에도 상당수 이 섬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41년부터는 '노무자 모집이나 국민징용령', 즉 강제동원에 의하여 조선과 일본 각지에서 억지로 탄광에 끌려오기 시작했다. 동 직원은 "다카시마에 가장 광부들이 많았던 때가 5000명 이상이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조선인이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른바 '나가사키시 역사교육위원회'가 제작한 설명판의 '역사 누락'을 목격하면서 '역사 교육'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 노조 중에서도 탄광노조는 가장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온 것으로 평가받지만 다카시마에서 성장한 지역 출신의 어느 시민운동가에 따르면 "탄로는 전투적으로 사측과 싸우며 협상을 해나갔지만 미쯔비시라는 기업 전체에 대해서 타격을 가하는 공개적 비난활동을 하거나 기업의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의 부도덕성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석탄자료관을 나오면 건물 부지에 풀밭이 조성돼 있는데, 이곳에는 다카시마와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쌍둥이 같은 섬, 즉 동일한 미쯔비시 광업이 탄광을 경영한 하시마의 모형도가 전시되고 있다. 본래 섬의 이름이 '하시마'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사람들에겐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해져 있다. 마치 바다의 요새를 연상시키는 외관이, 당시 군함 '도사(土佐)'와 매추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군함도(軍艦島)'인데, 이제는 본명이자 행정명인 하시마보다는 별명으로 더 널리 불리우고 있다.
당시 강제동원 현장의 어느 곳이 덜 괴롭고 어느 곳이 더 가혹했는가를 비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간신히 살아남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이 살 곳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땅에도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겠거니 할 정도로 말이다. 하시마는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축도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므로 별도의 페이지를 할애하여 더 자세히 소개하는 기회를 갖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