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사람에게 따끔한 '벌침' 놓다

김남일 세 번째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 펴내

등록 2010.02.10 20:47수정 2010.02.10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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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남일 소설가 김남일(53)이 세 번째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문학동네)을 펴냈다
작가 김남일소설가 김남일(53)이 세 번째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문학동네)을 펴냈다 이종찬

사람이 너무 착하고 좋아, 그저 그 얼굴만 떠올려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썩 좋아지는 작가가 있다. 그는 가난을 똥지게처럼 등에 지고 살지만 가난에 찌들리거나 가난 때문에 헉헉거리며 살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가난에게 말을 걸고, 토닥이며, 제 몸처럼 여긴다. 때문에 그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가 작가 김남일이다. 그는 지구촌 곳곳에 있는 가난을 어루만지기 위해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만든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끊임없이 괴롭히자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라는 모임도 만든다. 아시아 문화를 서로 주고받기 위해 <아시아문화네트워크> 대표를 맡기도 했다.


글쓴이가 작가 김남일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허리춤께 작가회의 사무실에서였다. 그는 그때 첫 장편소설 <청년일기>를 펴내기 위해 마악 탈고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글쓴이는 그때 그를 보자마자 첫 눈에 '아름다운 청년 김남일'이라는 낱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투에서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장섰다.     

그런 그에게 글쓴이가 첫 시집 <노동의 불꽃>을 건네자 빙그시 웃으며 "이제 정말 시인이 됐네"라고 했다. 그가 툭 내던지는 생뚱맞은 소리에 글쓴이가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그럼 첫 시집을 내기 전까지는 제가 시인이 아니었단 말씀입니까?"라고 묻자 "시집을 내기 전까지는 시인이 아니라 신인이지"라고 해 한바탕 크게 웃은 때가 있었다.

불도 안 뗀 냉골에서 입김으로 쓴 장편소설

작가 김남일  토끼 모습을 띤 '토끼 영장류' 남자 차상문이 이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삶을 문명 비판이란 작대기로 쿡쿡 찌르고 있는 이 책은 모두 58꼭지로 나뉘어져 있다
작가 김남일 토끼 모습을 띤 '토끼 영장류' 남자 차상문이 이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삶을 문명 비판이란 작대기로 쿡쿡 찌르고 있는 이 책은 모두 58꼭지로 나뉘어져 있다 이종찬
"강원도 홍천의 겨울, 불도 안 뗀 냉골에서 나는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자판을 눌렀다. 잠시라도 멈추면 손이 곱아왔으므로, 주인공 토끼는 마구 앞으로만 내달렸다. 그래. 인간 영장류에게 본때를 보이는 거야. 유한한 화석 에너지를 터무니없이 낭비하는 인간들! 숨 쉴 때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인간들!"-'작가의 말' 몇 토막

소설가 김남일(53)이 세 번째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문학동네)을 펴냈다. 식민지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이 겪었던 깊은 아픔을 흑백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그려낸 7권짜리 두 번째 대하소설 <국경>을 펴낸 뒤 14년 만이다. 그는 지난 2007년 소설집 <산을 내려가는 법>을 펴낸 바 있다.


토끼 모습을 띤 '토끼 영장류' 남자 차상문이 이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삶을 문명 비판이란 작대기로 쿡쿡 찌르고 있는 이 책은 모두 58꼭지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여느 장편소설들이 꼭지 앞에 작은 제목을 다는 것과는 달리 번호만 매겨져 있다. 그저 1, 2, 3으로 시작해서 58로 끝이 난다는 그 말이다.   

작가 김남일은 "기술 발전에 반대하며 우편물 폭탄 테러를 자행했던 미국의 천재 수학자 유나바머로부터 모티프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전처럼 정색하는 대신 풍자적으로 주제를 다루려 했다"며 "주인공을 토끼로 바꾼 뒤 2008년 10월부터 4개월 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구들이 무너진 강원 홍천의 냉골에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자나깨나 즐겁게 썼다"고 귀띔했다.


우가 좌를 성폭력하다

어쩐 일인지 독한 양잿물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빨간 핏덩이와 함께 옥문 밖으로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머리도 발도 아닌 귀였다. 게다가 그 귀가 산전수전 다 겪은 산파조차 처음 보는 아주 긴 귀였다. 억조창생 중에 토끼가 아니라면 그런 귀가 없을 텐데, 세상에, 진짜 토끼였다.-18쪽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천재토끼 차상문은 토끼 모습을 띠고 태어난 '토끼 영장류'이자 남자다. 차상문 어머니는 외딴 시골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하다 오빠를 수사하던 공안경찰에게 겁탈당해 그를 가졌다. 차상문 어머니는 지독한 양잿물까지 마시고 뱃속에 든 아이를 없애려 하지만 아기는 끝내 옥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산파 이간난은 산모에게 지금 갓 태어난 아기가 토끼이며 남자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그때 산모는 고개를 들어 제 배에서 나온 그 괴이한 생명체를 보았지만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는다. 토끼 영장류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문기자, 과학자, 의사 등이 산모와 토끼 영장류를 찾아 나서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산모 유진숙은 칠흑 같은 밤, 조산원을 빠져나와 거센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유진숙은 갓 태어난 토끼 아기가 편히 쉴 곳은 엄마 품뿐이라는 것을 알고 며칠을 눈보라 속에서 헤매다가 어느 허름한 여인숙 굴뚝 곁에서 저고리 섶을 풀어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끝까지 피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생각을 하며.       

IQ200 천재토끼 차상문이 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물음표

아버지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나무 분재 주변에 마사토가 왜 이리 많이 흘려 있냐며 어머니를 몰아세우더니 기어이 손찌검을 시작했다. 매번 겪는 일상이지만, 차상문은 겁이 나서 얼른 제 방으로 숨었다. 다행이 평소보다 폭력의 정도가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옷은 조금 찢어졌지만, 잘하면 따귀 몇 대 정도로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늘 그래왔듯이 한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어머니! 차상문은 세상 모든 것을 배반해도 결토 어머니만큼은 배반하지 않겠노라,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다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영리한 차상문은 갑자기 자신이 이 말도 안 되는 야만에 동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82쪽   

공안경찰이었던 차상문 아버지 차준수는 기어이 어머니 유진숙을 첩으로 들인 뒤 늘상 주먹을 휘두른다. 아버지에게 매일 얻어맞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자란 차상문은 겁도 많지만 너무 순진하고 착해 조그만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 여기에 IQ 200이라는 타고난 천재토끼이기 때문에 가끔 희한한 물음을 툭툭 내던진다.

차상문은 머리가 너무 좋아 질투를 느낀 선배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기도 하지만 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며 고민한다. 마침내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난 차상문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겪으며 남북관계와 민주주의, 외국인 노동자, 성 문제 등을 온 몸으로 느낀다.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최연소 종신교수가 된 차상문은 산업문명에 반대하는 쿠나바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싫증을 느낀다. 차상문은 그때부터 자신이 태어나는 과정과 자신이 지닌 토끼 모습을 바라보며 뿌리 깊은 물음에 잠긴다.

디지털로 디지털을 칠 수 없다

작가 김남일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천재토끼 차상문은 토끼 모습을 띠고 태어난 '토끼 영장류'이자 남자다
작가 김남일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천재토끼 차상문은 토끼 모습을 띠고 태어난 '토끼 영장류'이자 남자다 이종찬
"이웃과 주변, 그리고 장구한 세월 억조창생이 이끌어온 역사와 시간, 기억과 꿈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배려해야 한다. 시간적으로는, 당신들의 현재가 과거의 소중한 유산이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종자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공간적으로는, 당신들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말 그대로 억조창생이 더불어 사는 공간인 것이다. 게다가 당신들은 생각만큼 영리하지도 않다."-328쪽

차상문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당신들은 헛똑똑이들이다, 영혼까지도 없는!" 것들이라 여긴다. 왜? 이 세상을 사람 중심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란 게 유네스코 보고서 '새로운 영장류의 출현과 지구의 미래'를 왜 미 CIA가 극구 나서서 비밀문서로 숨겼는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차상문은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고 내걸고 창간한 <오마이뉴스>에 나오는 특종기사를 바라보면서 인터넷이 가진 힘에 놀란다. 그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이제는 '모든 길은 인터넷으로 통한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여긴다. 인터넷을 잘 이용하면 장엄한 전쟁을 훨씬 효과적으로 치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장엄한 전쟁이란 다름 아닌 여러 정보가 담긴 보안 서버도 해킹을 통해서 얼마든지 망 모두를 흔들어놓거나 마비시키는 것이다. 차상문은 이 세상 모두가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런 세상을 허물기 위해 스스로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도 가진다. 하지만 "디지털을 디지털로 친다"는 것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토끼 영장류, 이 세상과 한국 현대사를 꿰뚫다

작가 김남일이 쓴 <천재토끼 차상문>은 좌파와 우파 사이에 성폭력으로 태어난 차상문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낀 남북관계와 민주주의, 외국인 노동자, 성 문제 등을 골고루 파헤친다. 이 소설은 해방 전후부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와 호흡을 함께 나눈다.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또 하나 아름다움은 짤막짤막하게 끊어놓은 문장과 토끼 영장류를 통해 끝없이 이어지는 탁월한 상상력이다.

작가 박범신은 "기발하고 재미있고 슬프고 무섭다"며 "좌, 우 폭력적 결합을 통해 태어난 토끼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그 발상에서 협소한 우리 서사문학의 지평을 넓혔고,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상상력 때문에 흥미진진하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전반적 부정과 반역을 드러내 슬프기 한정 없고, 그 모든 것이 강력하게 오늘날 우리 삶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섭다"고 썼다.

작가 김남일은 1957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983년 <우리 세대의 문학>에 단편 '배리'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청년일기> <국경>이 있으며,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청소년소설 <모래도시의 비밀> <골목이여, 안녕>, 인물평전 <안병무 평전>을 펴냈다.

산문집으로는 <책>, 어린이 인물이야기로는 <통일할아버지 문익환> <늘푸른 역사가 신채호> 등이 있다. 상금이 없는 제2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받았으며,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창립회원, <아시아문화네트워크> 공동대표를 맡았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문학동네, 2010


#김남일 #천재토끼 차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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