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 덕충동 1829번지 마래산 아래에는 충민사가 있다. 충민사는 선조 34년(1601) 체찰사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민심을 살펴본 후 통제사 이시언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으로 국가 사적 제 381호이다.
충민사를 세우자 우부승지 김상용이 선조께 간청하여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짓고 그것을 새긴 현판(賜額)을 받음으로써 이충무공과 관련된 최초의 사당이 되었다.
이 충민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고종8년(1871) 5월에 철폐되었다. 이충무공서원인 여수 충민사 , 아산 현충사 그리고 통영의 충렬사 등이 모두 사액서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표가 될 1인을 1개 서원 이외에서는 향사하지 못한다는 원칙과 그 당시(고종8년)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에 있다는 이유로 통영의 충렬사만을 남기고 철폐되었다.
여수시민 대부분은 석천사 절에 대해서 알지만 이충무공 기념사업 제1호이었던 충민사는 잘 알지 못해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 실상 석천사는 공을 모시고 따라 다니던 옥형이라는 스님이 공을 잊지 못하여 충민사 곁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제사를 지내던 절이다. 다행이 1993년 6월 1일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아산 현충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충민사 성역화의 필요성... 충무공에 관계된 최초의 사액서원
충민사는 원래 본영에서 공을 모시고 있던 교리 박대복이 공을 사모하여 두어 칸 사당을 짓고 제향을 드리고 있었던 터전이었다. 공의 순국 3년뒤에 우의정 이항복이 왕명으로 전후 민정시찰 겸 이 고장에 내려와서 여러 장수들과 사당 세울 것을 의논한 결과 후임 통제사 이시언의 주관하에 이 사당이 건립되었다.
그 뒤 그 터전에 단만을 쌓았다가 시민들이 합심해 중수하였으나, 1919년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철폐되었다. 광복 후 1947년 충민사를 다시 세워 유림에서 관리하고 있다. 사당에는 충무공을 주신으로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배향하고 있다.
충민사는 역사상 충무공과 관계된 사당으로서는 국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통영의 충열사보다는 62년, 숙종 30년(1704)에 세워진 아산 현충사보다는 103년이 앞선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와 타루비(墮淚碑)도 충민사에 모아야
여수에 대한 역사를 잘 모르는 외지 방문객들은 여수에 가면 오동도, 진남관, 향일암을 빼고는 볼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수 역사를 알고 나면 여수가 얼마나 역사유적이 많은 지 놀랄 것이다.
약간이라도 높은 산 정상에는 성곽과 봉화대가, 시가지와 마을에는 석기시대의 유물과 우리나라의 굴절된 역사적 자료들이 넘친다. 하지만 여기서는 국가를 구한 충무공과 연관된 대표적 유적인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타루비를 충민사에 모을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대첩비는 충무공 순국 22년 후인 광해군 12년(1620)에 전라좌수영성의 서문밖에 세웠다. 비문은 백사 이항복이 짓고, 남창 김현성이 글씨를, 선원 김상용이 전자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충무공 관계 기념비의 제1호 일뿐만 아니라 높이 3.06m, 폭 1.26m로 국내 최대의 비석이다. 이에 비해 해남 우수영의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높이 2.7m)의 건립은 순국 87년 후인 숙종11년(1685)이고, 아산의 신도비는 순국 95년 후인 숙종 19년(1693)이다.
그리고 이 비는 일제말 일인 경찰서장 마쓰끼(松木)이라는 자가 비석과 타루비를 암반출하여 경복궁 후원에 방치한 것을, 해방 후 민관이 합심하여 되찾아다가 고소대에 12평 규모의 비각을 재건해 1973년에 안치했다(보물571호).
고소대 안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오른쪽에는 보물 1288호인 타루비(눈물짓는 비석)가 있다. 높이 97㎝인 이 비석은 옛날 중국 진나라 때 양양땅 백성들이 그 고을 태수 양호의 덕을 사모하여 비를 세우고 사당을 지어 제사 지냈는데, 그들이 그 비석을 바라보고 그리운 눈물을 지었기 때문에 '타루비'라고 불렀다는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장군이 돌아가신지 6년 후인 1603년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대첩비와 타루비가 모셔진 여수시 고소동 일대는 좁아서 버스가 들어갈 수 없고 진남관과도 떨어져 있어 특별히 찾아가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또한 근방에는 승용차가 주차할 공간도 마땅치 않아 역사에 관심이 없는 여수시민도 찾기가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연전에 뜻있는 분들이 진남관이나 충민사로 옮기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지금은 조용한 상태이다. 시민들이 찾기 곤란한 이곳에 두지 말고 충민사로 이전해 후세들에게 교육 자료로 삼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석천사 주지인 진옥스님은 "멀리 봐서 좌수영성을 복원한다면 현 위치에 두는 것도 괜찮다"고 말했다.
아산 현충사와 통영의 충렬사는 어떤 곳인가. 현충사는 충무공의 성장지이다. 그러나 공은 서울에서 태어나 외가인 충남 아산에서 성장했을 뿐이다. 또한 노산 이은상은 통제사 임명을 받은 곳이 한산도이고 거기서 3년 8개월간 주둔하였으므로 당초의 통제영은 한산도라는 주장을 폈다.
난중일기를 보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에도 한산도를 '한산도' 또는 '한산진'이라는 표현을 쓰고, 수시로 여수로 돌아와 군무를 볼 때마다 '본영' 또는 '영'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공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호남 수군들과 함께 국난을 이기고 나라를 구한 근거지는 여수좌수영성이다.
조정에서는 경상좌․우수영 수군이 임란초기에 패배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연전연승하자 선조26년(1593) 8월에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 직함을 내렸다. 선조 34년(1601)까지 약 9년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수군의 최고사령부였던 여수는 제4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여수는 해양 방어상 서쪽에 치우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통제영을 거제 우수영으로 옮겨감에 따라 본영(통제영)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여수는 임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구국의 성지이며 거북선의 건조지이다. 또한 충무공이 어머니를 모시고 지극한 효행을 베풀던 인륜의 고장이다. 공에 대한 유물과 사료를 충민사에 모아 후세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여수신문에도 송고합니다
2010.02.19 18:10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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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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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여수충민사 성역화에 더 많은 노력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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