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문증평 덕곡리에 있는 연병호 생가의 싸리문.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하주성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초라한 집을 만나는 순간 눈물이 흘러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 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생활을 했을까? 초라한 집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부인과 자녀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 선생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 가족들 역시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집에서 한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