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당지전,물색,명줄이 매달려 있는 당나무가 특색이다.
이광진
이 곳은 '궁당'이다. 전에 선보였던 '다끄내' 마을(수근동) 사람들의 본향당이라는 궁당의 안은 서너 사람이 들어서면 공간이 비좁아질 기세이다. 하지만 용연에 있는 고시락당에 비하면 양반이고, 게다가 사라진 내왓당에 비하면 임금님인 셈이다.
이곳에서 걸어서 10여 분 남짓 걸리는 한천교 너머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고 추측하는 내왓당은 제주도 4대 신당에 꼽힐 정도로 이름난 곳이었다. 이 당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바 있는 이른바 '전국구'인데, 단종에게서 왕위를 앗은 세조 때에 일어난 일 때문이다. 당시 제주분대어사인 강우문이 안무사로 부임한 복승리에 대해 단종의 그림을 그려 요사한 제사를 지낸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이는 강우문이 복승리를 음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듬해인 세조12년(1466) 7월 27일에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일에 강우문(姜遇文)이 아뢰기를, '천외당신(川外堂神)의 화상은 이미 불에 타버렸습니다.' 했는데, 지금 강우문이 말을 만들어 일을 발생시킨 정상(情狀)을 알아 내어 이미 죄를 다스렸으니, 그 당신(堂神)은 옛날과 다름 없이 제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위에 나온 '천외당'이 바로 내왓당의 한자말이며, 또 불에 타버렸다는 화상이 바로 '내왓당 무신도'를 뜻하는 것이니 오늘날 남아 전하는 것이 불에 타버린 그것과 적어도 유사한 방식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불에 타버렸다는 것이 강우문이 증거를 은폐하기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말일 가능성도 많으므로, 현존하는 '내왓당 무신도'를 당시에도 있었던 이른바 '진본'으로 여길 만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구설수에 올랐던 내왓당은 그날 이후로 제자리를 찾았으리라마는 고종 때인 1882년에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그에 따라 무신도를 집에 가져가 보관하고 있던 심방(무당) 부부가 훗날에 죽게 되니 이를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전한다.
내왓당에서 모셨던 신은 12신위, 오늘날 남은 그림은 10폭, 그러니 2장의 그림이 없는 셈이다. 내왓당 무신도를 처음 보는 이의 십중 팔구는 '무섭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이 느낌은 다른 말로 '경외감'이라 고도 할 수 있겠는데 종교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을 것이라 여길만한 증거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점은 육지부의 무신도(무화)와 가름하는 특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