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난민이여, 당신의 망명지는 바로 여기

[서평] 에릭와이너의 <행복의 지도>... 네덜란드, 부탄 등 10개국 추천

등록 2010.03.05 14:52수정 2010.03.0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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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지도
행복의 지도웅진지식하우스
네팔은 온 세계 히피들의 종착역이라고들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라의 풍경은 이색적이다. 얼핏 보면 한국인을 닮은 현지인도 많지만, 화려한 문신을 훤히 드러낸 상의에 출렁이는 네팔 전통바지를 입은 야만적인 회색 눈동자의 여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떡진 레게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남성, 눈썹 언저리와 입술에 피어싱을 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스쿠터를 타는 성별이 식별 불가능한 사람도 있다.

자연과 스릴을 찾는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서 포카라로 모여든다. 특히 포카라에는 여행을 왔다가 아예 눌러사는 유럽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래프팅이나 패러글라이딩 등의 익스트림 스포츠 가이드로 일을 하면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갈 생각을 않는다. 왜 왔느냐는 내 질문에 "모험(adventure)이 좋아서요"하며 웃기만 했다.


흔히들 난민이라고 하면 전쟁이나 재난으로 더 나은 살 곳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에릭 와이너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쓴 여행기 <행복의 지도(Geography of Bliss)>(김승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는 이런 사람들을 일컫는 '쾌락난민(hedonic refugees)'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억압적인 정권을 피해 도망친 정치적 난민도 아니고,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은 경제적 난민도 아닌, 그저 새로운 땅, 새로운 문화에서 더 행복하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을 옮긴 쾌락난민.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자기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 순간을 겪었다면 당신도 잠재적인 쾌락난민일 수 있다.

쾌락난민 여객기에 탑승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래의 출입국카드(Embarkation Card)를 작성하라.

[쾌락난민 여객기용 출입국카드]
아래의 질문에 0점에서 10점까지 부여하라.

① 당신은 외향적이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편입니까? (P지수)
② 당신은 긍정적이고, 우울하고 침체된 기분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나며
    스스로 잘 통제하는 편입니까? (P지수)
③ 당신은 건강, 돈, 안전, 자유 등 당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만족합니까?
    (E지수)
④ 당신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당신의 일에 몰두하는
    편이며, 당신이 세운 기대치를 달성하고 있습니까? (H지수)


아래의 방법을 따라 결과를 도출하라.
①+②+(③×5)+(④×3)= ________점

"행복한가요?"


오늘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한 사람,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예비엄마,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질문에 거침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2002년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Rothwell)과 인생상담사 코언(Cohen)은 '행복공식'을 발표했다. 그들은 18년 동안 1000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80가지 상황 속에서 자신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5가지 상황을 고르게 하는 실험을 하였다. 그 결과 행복은 인생관, 적응력, 유연성 등 개인적 특성을 나타내는 P지표(personal), 건강, 돈, 인간관계 등 생존조건을 가리키는 E지표(existence), 야망, 자존심, 기대, 유머 등의 고차원 상태를 의미하는 H지표(higher order) 등 3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당신은 출입국카드에 그들이 제시한 방법을 따라 행복지수를 산출했다. 만점인 100점에 근접할수록 행복도가 높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당신의 행복지수가 낯설어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처음으로 수치화된 당신의 행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수치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행복지수 산출방법은 아직 한창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저 타로 카드 점을 보듯이 기분 좋았으면 됐다.

60점 이상은 양호하니 돌아가라(그렇지 않으면 좌석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학점으로 치면 F학점인, 60점 미만인 당신들은 지금 너무도 행복하지가 못하기 때문에 잠시 쾌락난민 여객기 1등석에 탈 영광을 주겠다.

에릭 와이너는 세계행복 데이터베이스(World Database of Happiness)를 기초로 하여 네덜란드·스위스·부탄·카타르·아이슬란드·몰도바·태국·영국·인도·미국 등 10개국을 돌며 공간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살핀다. 그 염탐기가 바로 이 '행복의 지도'이다.

<스위스>
스위스는 안락사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법을 가진 나라다. 그래서 유럽 전역에서 사람들이 죽으러 온다. 다른 이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삶의 방식이 몸에 배어 있는 이 나라에는 공용어만 네 개가 된다. 밤 10시 이후에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거나 일요일에 자기 집 잔디밭을 깎는 것이 불법이지만 자살은 합법이다. 이 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는 어떤 행복에 관한 조사에서도 늘 상위권이다.

<부탄>
부탄의 왕축 국왕은 1973년에 "국민행복지수가 국민총생산보다 더 중요하다"는 과격한 발언을 한다. 부탄은 우리 삶에서 돈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단호히 나선 나라다. 전 국민에게 의료서비스와 교육이 무료로 제공되고 담배는 판매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1999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텔레비전이 도입된 부탄에서 행복의 개념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부탄 사람들에게 행복은 집단적인 노력을 뜻한다. '국민행복지수(GNH)'는 이제 공공연한 개념이 되었다.

<카타르>
50년 전만 해도 진주를 따고 양을 길러 먹고 살던 가난한 나라 카타르는 엄청난 매장량의 천연가스층을 발견한 후 졸부가 되었다. 정부에서 모든 국민에게 한 달에 7000달러씩을 주는데, 세금도 없으며 결혼을 하면 집 지을 땅까지 준다. 카타르에 돈을 벌기 위해 온 외국인들이 모든 잡일을 다 해주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세제'라는 단어도 알지 못한다. 평생을 부족함 없이 먹고 살 돈이 있는 그들에게 없는 것은 문화다. 요리도 문학도 예술도 없다.

<아이슬란드>
매일 평균 스무 건의 지진이 발생하는 아이슬란드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술을 창조하고 즐긴다. 예술적 아이디어와 기술을 공유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아이슬란드에는 예술가와 작가의 비율이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높다. 이곳에서 실패는 낙인이 되지 않으며(물론 유럽식의 사회복지제도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다양한 직업을 거치는 것이 아주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다.

<태국>
태국 사람들은 자기 운명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만약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갑자기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저자는 말한다. 태국인들에게 삶은 그냥 한바탕 놀이일뿐이다. "태국 사람들은 무슨 일에든 심각해지는 법이 없어요. 우린 어떤 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죠. 우린 무슨 일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인도>
"미국인들이 인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긴장을 풀고 쉬는 법, 겹겹이 겹쳐져 있는 여러 개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울 수 있겠죠. 인도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그래서 우리는 불완전한 것들을 많이 수용하죠."

고귀한 야만인, 가진 것이 거의 없는데도 행복하다는 것은 행복에 대한 고정관념이지만 허구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은 또한 가장 행복하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다. 인도의 행복지수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렇지만 가난은 행복을 보장하지도, 행복을 빼앗아가지도 않는다.

행복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틀린 경우가 많다. 다양성 속에 힘과 행복이 있다는 미국식 신념을 아이슬란드나 덴마크 같은 동일한 집단이 흔들어 놓는다. 소득분배가 잘 이루어진 나라보다 빈부격차가 큰 나라가 더 행복할 때도 있다. 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들 중에는 자살률이 높은 곳도 많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답변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세속국가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곳이 민주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도 있다.

행복 데이터베이스의 관리자인 루트 벤호벤은 이런 말을 했다.

"행복해지려면 사람이 살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지만, 낙원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한 스위스 여성의 말처럼 행복의 정의는 이런 방법으로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행복은 이런 건지도 몰라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하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 말이죠."

행복의 지도에 따르면 당신의 좌절은 열심히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수단을 어느 누구보다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족하지 못하는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다. 어쨌거나 행복하지 않은 당신과 내가 대체 어디로 가면 도장만 수북한 여권을 찢어 버릴 수 있을까. 진심으로 건투를 빈다.

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8


#행복의 지도 #에릭 와이너 #쾌락 난민 #행복지수 #HEDONIC REFUG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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