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정문 사이로 본관이 보인다.
김한내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양심적 대학 거부자라고. 예슬씨가 대학을 거부하겠다고 쓴 글을 보고 작은 응원의 마음을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언론에서는 예슬씨의 행동을 "자발적 자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보다는 더 좋은 표현이, 예슬씨의 마음과 행동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말이 있을 듯했습니다.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양심적 대학 거부자'라는 호칭을 붙여봅니다.
예슬씨는 대학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명문' 고려대학교 경영대에 '다녔던' 예슬씨는 그 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학교 후문에 붙인 그 글에는 지금 우리사회의 대학이 가진 의미와 그것을 거부하는 본인의 신념이 잘 담겨있었습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더 이상 '큰 공부(大學)'가 사라진 대학에서 당신은 자신이 대학생으로 존재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양심적 거부라는 것이 자신을 강제하는 무엇인가를 스스로의 신념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것이라면, 전 예슬씨의 행동을 '양심적 대학 거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대학은 강제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따라서 자기가 시험 봐서 입학한 대학을 자퇴하는 것이 무슨 '강제'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슬씨, 지금부터는 불편할 것입니다예슬씨는 말했습니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강제라는 것은 내 눈 앞에 몽둥이를 들고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선을 넘었을 때 자신에게 올 폭력을 예감한 순간, 이미 폭력은 시작된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대학 졸업장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예감했던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가는 곳이었습니다.
경주마처럼 달렸던 예슬씨는 살기 위한 먹이사슬 피라미드에 꽤 높은 곳에 올랐습니다.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알았습니다. 그곳의 그 누구도 자신은 누구이며, 진리란 무엇이고, 우정과 낭만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는 것을. 예슬씨의 글은 그 순간의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한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양심적 거부자는 세상을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는 학벌주의가 문제임을, 지금의 대학교육이 문제임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선 밖에 설 용기는 없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소리쳤던 운동권도 늘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학에 다녔는지를, 그 대학 졸업증을 가졌지만 자신은 '도덕적이게도'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음을 은연중에 자랑합니다. 더러운 교육현실을 비판하지만 자신의 자식들은 그 진흙탕 속에서도 꼭 승리해주길 바랍니다. 그들 역시 예슬씨과 다르지 않은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는 불편할 것입니다. 불편함을 느끼고 살아가면서 자신을 조금 더 성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슬씨가 세상에 던지 외침과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부자'보단, 삶의 '소유자'가 되길 바랍니다더 근본적 고민도 가져봅니다. 만약 예슬씨가 고려대학교 학생이 아니었다면, 예슬씨의 거부가 이렇게 기사화되고 예슬씨와 일면식도 없는 제가 이런 글을 썼을까 생각입니다. 만약 예슬씨가 지방대학교 학생이었다면, 우리 사회의 반향이 이렇게 있었을까요. '기득권을 포기한 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 속에는 이미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슬씨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 모두에게 뼛속까지 박혀있는 학벌주의의 무서움입니다.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라고 예슬씨는 말했습니다.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라고 했습니다. 당당한 기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런 마음으로 부탁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이제 곧 예슬씨에게는 "고려대학교 자발적 자퇴자"라는 타이틀이 붙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슬씨에게 우리 사회의 대학과 학벌주의에 대한 생각을 물어볼 것이고, 예슬씨의 대답은 삶을 담은 말로서 무게감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대학'이라는 선밖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예슬씨는 명문대 대학 졸업장을 포기했지만,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습니다. 대안학교를 다니면서 주류의 가치를 비판할 수 있는 교육을 받는 이들 옆에는, 북적이는 '공교육' 속에서 꿈꿀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강해지기 보다는 넓어지길 바랍니다.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신념의 소유자로서의 '거부자'가 되기보다는, 보다 더 많은 이들의 공감을 만들 수 있는 삶의 소유자가 되길 바랍니다.
본래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 명, 두 명 무거운 걸음을 옮기다보면 결국 길이 됩니다. 당신의 걸음을 응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1년 6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현재 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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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양심적 대학거부자'라고 불러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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