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깨우던 '죽비소리', 법정 스님을 떠나 보내며

<오두막 편지>를 읽다가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다

등록 2010.03.11 18:15수정 2010.03.1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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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
법정스님동쪽나라
글을 쓰다보면 무거운 마음이 행간을 앞질러 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청탁받은 글을 쓸 때가 그렇고, 혹평을 피하기 어려울 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보다 훨씬 더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몸져누운 분들의 책을 펼 때입니다.

'몸져눕는다는 것'. 저야 이제 30대 중반에 막 이르렀으므로 미처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지난해 어느 날,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응급실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봐야하는 신세가 되기 전까지요.


결국에는 꾀병으로 판정되었지만 응급실에 누워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하더군요. 무엇보다 몸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것이 몸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집착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몸져눕는 것이란, 세상으로부터 타자들로부터 그리고 긴 시간으로부터 외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얻게 되었습니다. 법정(法頂) 스님의 책 몇 권을 펴든 까닭도 몸져누워있는 그 분의 외로움을 조금 달래볼까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합니까. 제가 <오두막 편지>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도 전에 "법적 스님 입적"이라는 속보를 접해야만 했습니다. 법정 스님! 본래 죽음이 그렇다지만, 오두막에서 병고로, 그리고 죽음으로 끝내 외로운 길을 걸어가시는군요.

수행의 한 흔적으로서의 글쓰기

<오두막 편지>라고 하니, '오두막'이라는 단어에 먼저 시선이 갑니다. 그 단어를 반복하여 발음하다 보면 말이 참 예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딘가 쓸쓸한 구석이 있습니다. 사전을 뒤적여보면 '작게 지어 사람이 겨우 거처할 만한 막'이라는 풀이가 나옵니다. 그렇게 법정 스님은 자신의 몸 하나 겨우 거둘 수 있는 움막에서 이 책을 쓰셨나 봅니다. 이 책에서 법정 스님은 명상의 전제 조건으로서 '홀로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눈과 귀에 방해물이 적은 고요하고 깨끗한 방에서, 가볍고 느슨한 옷으로, 방석을 깔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는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우선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숨을 고르게 쉬면서 귀를 기울인다. 무슨 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요를 지켜보라는 뜻이다. (p.85)

오늘날 '명상'은 고상한 여가쯤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만, 법정 스님은 명상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인식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명상의 전제 조건으로 '홀로 있음'을 강조하셨던 것이겠지요. "고요를 지켜보라"라는 저 구절이 저에게는 명상을 하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그러니까 명상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홀로 있음, 그리고 수행의 한 조건으로서 홀로 있음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저는 수행이나 불교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글쓰기가 수행의 한 방식이라는 점은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인식은 불교에 관한 책을 조금 뒤적여본 것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며칠간 <오두막 편지>를 읽으며 그러한 제 생각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이 책에서  법정 스님이 "명상은 홀로 누리는 신비로운 정신세계이다"(p.86)라고 말씀하신 것 역시 그러한 수행의 방식에 대한 말씀이겠거니와, <오두막 편지>는 그러한 연장에서 자신을 오두막에 가두고 수행한 흔적의 하나로 읽힙니다.

사회비평 혹은 문명비평으로서의 글쓰기

오두막편지 법정 스님이 1999년 펴냈고, 10년 만인 2009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오두막편지법정 스님이 1999년 펴냈고, 10년 만인 2009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이레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야 이제 막 글쟁이를 자처하며 나선 셈이지만, 종종 글쓰기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행위인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특히 자조적인 글쓰기를 할 때면 그러한 함정에 빠지기 쉽지요.

이것은 제 글쓰기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흔히 잡문으로 불리기도 하는 수필이 본디 그러한 양식이니까요. 그러나 다행히도 <오두막 편지>는 수행의 한 흔적을 보여주면서도 그러한 자조적인 글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에게 내리는 죽비 소리 같은, 때론 큰 호통 같은 면모를 이 책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간의 가슴을 잃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든지 밝은 세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가슴을 일게 되면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산다 할지라도 암흑으로 전락하고 만다. 국민 각자가 자신들이 하는 일에서 마음껏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치의 몫이다. 국민생활에 불편과 부당한 간섭과 충격을 주지 않는다면 활발한 촉매작용으로 삶의 결실을 알차게 이룰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도 달려 있다. (p.141)

집필 연도가 1997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위의 글을 꺼내놓고 오늘의 우리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당치 않을 것입니다. 또 법정 스님이 우리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판명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다만, <오두막 편지>에는 수행의 한 흔적으로서의 글쓰기를 넘어 사회비평 혹은 문명비평으로서의 글쓰기가 엿보인다는 점은 밝혀둘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법정 스님의 이력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한 가지 특이한 이력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이력이지요. 오늘 법정 스님의 입적에 그러한 이력이 문득 먼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위의 글을 다시 읽어보며, 특히 "여기에 우리의 미래도 달려 있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다시 한 번 1960~70년대 스님의 이력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종종 죽비의 소리처럼 날카로운 법정 스님의 '사회비평으로서의 글쓰기', 혹은 '문명비평으로서의 글쓰기'를 그리워하겠지요.

며칠 간 <오두막 편지>를 가슴에 품고 읽는 동안, 그리고 스님의 입적 소식을 접하며 글쓰기의 양식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생멸 과정의 일부분으로 인식한다지만, 저와 같이 수행이나 불교에 미천한 이들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슬픈 일입니다.

작년과 올해 우리 사회는 유달리 많은 분들을 잃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큰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 떠나가신다는 것, 우리들이 존경했던 누군가가 떠나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오두막의 수행자처럼 외롭지만 죽비소리처럼 날카로운 법정 스님의 글들이 곁에 남아 있으니 다행입니다.

오두막 편지 - 개정판

법정 지음,
이레, 2007


#오두막편지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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