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동쪽나라
글을 쓰다보면 무거운 마음이 행간을 앞질러 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청탁받은 글을 쓸 때가 그렇고, 혹평을 피하기 어려울 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보다 훨씬 더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바로 몸져누운 분들의 책을 펼 때입니다.
'몸져눕는다는 것'. 저야 이제 30대 중반에 막 이르렀으므로 미처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지난해 어느 날,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응급실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봐야하는 신세가 되기 전까지요.
결국에는 꾀병으로 판정되었지만 응급실에 누워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하더군요. 무엇보다 몸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것이 몸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집착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몸져눕는 것이란, 세상으로부터 타자들로부터 그리고 긴 시간으로부터 외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얻게 되었습니다. 법정(法頂) 스님의 책 몇 권을 펴든 까닭도 몸져누워있는 그 분의 외로움을 조금 달래볼까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합니까. 제가 <오두막 편지>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도 전에 "법적 스님 입적"이라는 속보를 접해야만 했습니다. 법정 스님! 본래 죽음이 그렇다지만, 오두막에서 병고로, 그리고 죽음으로 끝내 외로운 길을 걸어가시는군요.
수행의 한 흔적으로서의 글쓰기<오두막 편지>라고 하니, '오두막'이라는 단어에 먼저 시선이 갑니다. 그 단어를 반복하여 발음하다 보면 말이 참 예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딘가 쓸쓸한 구석이 있습니다. 사전을 뒤적여보면 '작게 지어 사람이 겨우 거처할 만한 막'이라는 풀이가 나옵니다. 그렇게 법정 스님은 자신의 몸 하나 겨우 거둘 수 있는 움막에서 이 책을 쓰셨나 봅니다. 이 책에서 법정 스님은 명상의 전제 조건으로서 '홀로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눈과 귀에 방해물이 적은 고요하고 깨끗한 방에서, 가볍고 느슨한 옷으로, 방석을 깔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는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우선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숨을 고르게 쉬면서 귀를 기울인다. 무슨 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요를 지켜보라는 뜻이다. (p.85)오늘날 '명상'은 고상한 여가쯤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만, 법정 스님은 명상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인식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명상의 전제 조건으로 '홀로 있음'을 강조하셨던 것이겠지요. "고요를 지켜보라"라는 저 구절이 저에게는 명상을 하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그러니까 명상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홀로 있음, 그리고 수행의 한 조건으로서 홀로 있음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저는 수행이나 불교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글쓰기가 수행의 한 방식이라는 점은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인식은 불교에 관한 책을 조금 뒤적여본 것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며칠간 <오두막 편지>를 읽으며 그러한 제 생각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이 책에서 법정 스님이 "명상은 홀로 누리는 신비로운 정신세계이다"(p.86)라고 말씀하신 것 역시 그러한 수행의 방식에 대한 말씀이겠거니와, <오두막 편지>는 그러한 연장에서 자신을 오두막에 가두고 수행한 흔적의 하나로 읽힙니다.
사회비평 혹은 문명비평으로서의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