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허영춘에게 배우십시오

26년에 걸친 '진실을 향한 의로운 싸움'을 아십니까

등록 2010.03.24 14:24수정 2010.03.2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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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웃기고 울렸던 코미디언 서영춘 말고 허영춘을 아십니까? 그럼 허원근 일병은 아시나요? 허영춘은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입니다. 뜬금없이 웬 군인의 아버지 이야기냐고요. 오늘 민주주의를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권리를 말하고 싶고, 국가의 폭력을 말하고 싶고,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어 허영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고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
고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허영춘

허영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

허원근 일병은 26년 전인 1984년 전방의 한 부대에서 죽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허영춘은 전남 진도에서 아들이 근무했던 전방부대로 한달음에 달려갑니다. 무슨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죽은 아들의 몸뚱이를 부둥켜안고 넋을 놓는 일말고요.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어느 부모가 따질 겨를이 있겠습니까? 그저 사랑하는 아들의 주검을 보며 함께 죽고 싶은 생각만 들었을 겁니다.

지난 2월 3일 서울지방법원은 허원근 일병이 같은 부대 군인에게 사살되었고 제7보병사단 헌병대는 사고를 은폐하고 조작하였기에 유족들에게 국가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1980년에서 1988년 사이 군대에서 죽은 사람은 6500명입니다. 이 가운데 자살한 사람은 2500명입니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독재가 집권하던 시절입니다. 민간인도 의문의 죽음을 당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군에서 자살을 했는데, 누가 감히 의문을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 허영춘은 달랐습니다. 아들이 결코 자살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26년간 허영춘이라는 이름과 삶마저 사라지게 했습니다. 국가배상 판결이 있기 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눈 감을 수 있겠냐?" 그리고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이런다고 내 아들이 살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시는 군대에서 우리의 아들들이 죽는 일이 없도록, 나 같은 아버지가 생기지 않도록 하려고 싸우는 거다."


 의문사위가 '허원근일병 사망사건'의 재조사 결과를 중간발표하면서 공개한 사건 당시의 현장 지도와 고 허일병의 사망 모습을 담은 사진 등 브리핑 자료.
의문사위가 '허원근일병 사망사건'의 재조사 결과를 중간발표하면서 공개한 사건 당시의 현장 지도와 고 허일병의 사망 모습을 담은 사진 등 브리핑 자료. 오마이뉴스

26년에 걸친 진실을 향한 의로운 싸움

아버지는 진도와 서울을 오가며 진실을 향한 의로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진도에서 모를 심고 서울에서 싸우고 진도에서 추수를 하고 서울에서 싸우고, 그 시간이 자그마치 26년입니다. 기독교회관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100일이 넘는 농성을 하였고, 국회 앞에서 3년 동안 1인 시위를 하였습니다. 밤에는 법의학서를 공부하여 이제는 어느 부검의에 부족하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26년입니다. 그 싸움 어찌 여기에 주저리 늘어놓겠습니까. 그렇게 26년을 싸우며 진실을 위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갔습니다.


민주주의는 무엇일까요? 이명박 정권 나쁘다고 한나라당 못 됐다고 기자회견을 하는 걸까요? 하루 날을 잡아 도심에 모여 머리띠 묶고 구호 외친 뒤 흩어지는 걸까요.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는 허영춘과 같은 사람의 힘에 의해 차곡차곡 쌓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위한 끈질긴 투쟁에 의해. 세상은 이토록 지독한 싸움을 하지 않고는 바뀌지 않습니다. 보여주는 싸움이 아니라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개'처럼 싸워야 '개'같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김우룡의 큰집 조인트 발언이 나왔을 때, '사퇴해야 한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김우룡 사퇴는 안 된다'였습니다. 이건 이미 사퇴가 예견된 일입니다. 한 사회의 나침반이 되어야 할 언론이 권력 앞에 '조인트' 까진 절대절명의 사회위기가 김우룡의 사퇴로 묻힐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억울하고 쪽팔리다, 성명 발표하는 것보다 앞서서 할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9시 뉴스에서 앵커가 '방송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언론인 저희 자신에게 있습니다, 국민 앞에 사과하고 권력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겠다'고 약속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리본이라도 달고 뉴스를 진행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노동조합이 사장실 앞에서 농성하고 성명서 발표하는 일이 방송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자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에 앞서 언론인 개개인이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저항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김우룡 나가고, 김재철 사장도 나가면 누구랑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누구에게 무슨 진실을 찾을까? 새로운 사장 맞이하여 또 출근저지 싸움이나 할 것인가?

내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내가 해결의 주체가 될 때,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지켜지는 일일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저항은, 권리는 명분이 아닙니다. 진정성입니다. 나를 버리고 싸울 줄 아는 진정성.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허영춘이 민주주의 입니다

언론법 통과될 때 책임지고 국회의원 사퇴하겠다는 정치인 중 배지 정말로 버린 사람이 있나요? 4대강 망가지고 있는데, 책임지고 싸우겠다고 말한 사람들, 지금 몸으로 저항하고 있나요? 노동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총파업 하라는 말,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국회에서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모습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악법 철폐만을 외치며 '근심위(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인가? 참여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야무지게 저항하라는 말입니다.

민주대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보단일화가 한나라당 독주 막는 길이라는 것 다 압니다. 그럼 민주대연합에서 지금 보이는 민주당의 오만을 막으려면 어찌 해야 합니까? 없는 놈이 민주당에게 양보하는 게 방법입니까? 아니면 민주대연합을 기필코 이루기 위해 지금 가진 작은 기득권마저도 버리며 필사의 정신으로 민주당을 견인하는 게 방법입니까? 진보정당이고 민주노총이고 시민단체고 선언만 하지 말고 현실의 싸움을 하며 끝까지 시민과 한 약속을 지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남에게 책임 돌리지 말고. 더 이상 무능력만 한탄하지 말고.

내가 쿡, 하고 꼬집는 세상은 바로 나입니다. 세상은 고상하게 보여주는 대안으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대안이란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길이 있기에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걷다보니 길이 생긴 겁니다. 이명박 정권, 한나라당, 민주당, 그리고 재벌들을 말하기 전에 내가 솔직해지는 것, 내가 진정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그것을 몸 밖으로 꺼내고 이야기할 때, 아프지만 한발 나가는 겁니다. 양심과 진정성에 손을 얹을 때, 고통 받고 소외받는 이의 목소리와 연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웃기고 울리는 코미미언 말고 세상의 진실을 하나씩 찾아가는 허영춘을 아십니까? 허영춘의 몸짓이 높은 담을 무너뜨리고 보이지 않는 세상의 창을 엽니다. 허영춘이 민주주의입니다.
#허원근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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