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수없이 들어오던 노래건만 2010년 3월 26일, 중국의 대련에서 흐른 이 노래는 무언가 달랐다. 물론 한국의 노래를 중국에서 불러서 그랬던 까닭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당연하고 같잖은 얘기가 진짜 이유였겠는가. 물론 한 고3 학생의 낭랑한 하모니카 반주 덕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이런 당연한 얘기가 진짜 이유였겠는가.
3월 26일 이 순간, 바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여 북녘과 남녘이 작게나마 하나가 되었던 순간이다. 진짜 이유라면 그것일 것이다. 남북이 함께 한민족의 위대한 의인 안중근을 기리며, 씽씽 달리는 하모니카의 반주를 타고, 손에 손을 잡고 남녀노소 따스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한 자, 한 자 마음속에 박으며. 그동안 반민족세력에게 정당한 역사의 짐을 지우기 위해 발벗고 뛰었던 분들, 남북 공동의 기념행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분들, 통일을 위해 피땀 흘렸던 분들, 그 모두들에게 이 짧은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리고 그 순간이 행복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한참 어린 열아홉이라는 나이보단 세상풍파를 다 견뎌내야 할 고3이라는 타이틀에 묶여 이리저리 쩔쩔 매던 내게, 그 순간과 더불어 25일부터 27일까지의 2박 3일은 참 벅찼더랬다. 함께 간 세 명의 친구들에게도, 한 분의 선생님에게도, 가슴에 찡하게 남았더랬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지 하루가 지난 지금, "안중근이 되십시오"라는 말을 건네주던 어느 분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대부분 한국인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안중근 의사는 101년 전 하얼빈역에서의 의거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아니 그 정도 기억하는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안중근의 의거와 윤봉길의 의거가 헷갈리고, 안중근과 안창호를 헷갈려하는 요즘의 우리들에게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의거를 한 열사임과 더불어 100년 전에 이미 한중일 공동의 평화기구와 은행을 설립하자는 구상을 했던 시대의 선각자였고 평화주의자였다. 물론 일본을 비롯한 다른 민족, 나라들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를테다. 하지만 과연 이토록 깊은 철학과 평화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테러리스트가 또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봤을 때 그는 어떻게 불리든지 간에 역사 속에서는 온 사방으로 빛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그를 마음에 담고서 여순감옥에 발을 딛자 차마 카메라를 꺼낼 수가 없었다. 붉은색 벽돌의 적막한 수용소로 들어서자, 거기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분들의 영혼이 찬 공기에 섞여오는 듯 했다. 그리고 그 공기는 숨을 쉴 때마다 혀를 감싸 돌았다.
감옥 내에 마련된 기념관에서도 차마 기념촬영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의연한 표정으로 세워진 그의 동상 옆에 서 있기가 겁났다. 사형 집행 5분 전에 찍었다는 의연한 자태의 사진이 자꾸 그 동상과 겹쳤다. 동상은 동상일 뿐, 그 동상이 곧 안중근 의사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옆에 서 있기가 부끄러웠다. 추모행사가 꼭 슬프고 엄숙한 자리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옆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아서.
그리고 마침내 사형집행장소로 갔을 때는 가슴이 정말로 아렸다. 더더욱 카메라를 꺼내들 수가 없었다. 그냥 얼른 그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데 그는 어떻게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언뜻 영화 <모던보이>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그다지 재밌게 본 영화는 아니었지만, 비밀 독립운동가였던 김혜수가 자살폭탄을 터뜨리기 직전에 절절하게 중얼거렸던 그 말은 내 머리 언저리에 항상 남아 있다가 그 방에 들어가자 툭 내던져졌다. "아, 살고 싶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저녁에 마련된 남북 공동 만찬은 정말 즐거웠으니까. 반나절 동안 날 통째로 뒤흔들어놓았던 안중근 의사의 정신 아래 하나 되어 웃는 낯이 정말 설렜다. 서로를 소개하며 공감하고 연대하고 귀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을 부를 때에는 부끄러운 표현이지마는 가슴이 막 울었다. 꼭 그런 것 같았다.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으로 하나 된 그 풍경, 안중근 의사가 바랐던 그림이 꼭 그와 같지 않았을까.
학교에서는 나름 노장이었지만 그곳에서는 한참 어리기만 했던 나, 다음날 아침 미사를 보며 안중근 의사를 가슴에 담았다. 배신이 곧 출세가 되고 미래의 부를 위해 과오까지도 덮어야 하는 지금이다. 올바르게 저술된 근현대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네 빨갱이네 하며 뜯어고치더니 급기야는 역사도 선택과목이 되는 지금이다. 우리라도 그를 가슴에 품고 동생들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나 온갖 이기적인 폭력과 경쟁이 난무하고 있는 지금, 더욱 더 빛을 발하는 그의 사상을, 우린 조금씩이나마 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 된 그 풍경을 담으며, 3일 동안 날 흔들었던 그를 담으며, 그리고 그가 품고 있는 혹은 그를 품고 있는 역사를 담으며, 아침 미사가 끝났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르는 내 발걸음이 고3답잖게 무척 사뿐했던 것이 순간의 기분 탓은 아니었겠지. 아, 150주년, 200주년 때는, 우리 허리에 그어져 있는 금이 사라져 함께 할 수 있기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blog.hani.co.kr/dreame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3.29 10:54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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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적인 거북목 때문에 힘들지만 재밌는 일들이 많아 참는다. 서울인권영화제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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