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4년도의 청첩장
김수복
영원이라도 할 것처럼 극성을 부리던 일제의 만행이 끝나고 귀향한 남편의 머릿속에 아주 색다른 무엇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아내는 직감했다. 하지만 차마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지는 못하고 남편이 스스로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해방 정국에서 남편은 집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아내의 불안은 고조되어 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을 붙잡고 머릿속에 있는 것을 꺼내 보여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공포감에 입이 얼어붙어 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50년 6월 사변이 발발하고, 행방불명된 남편을 죽은 지도 석 달이 지난 뒤에서야 입고 나간 옷을 보고 시체더미 속에서 찾아내었을 때, 그때서야 도당의 비밀 감찰이었다는 둥, 세포 책임자였다는 둥의 소문이 들리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정황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채로 27살의 여인은 그만 과부가 되고 말았다. 7살, 그리고 2살의 어린 두 딸이 살아야 한다고 눈으로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장녀인 강선자씨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버지가 좌익이었다면 어딘가 그 기록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가족은 연좌제에 걸려 공무원 같은 것을 전혀 할 수가 없었을 텐데, 그런데 동생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교육공무원이란 말이거든요."첩보기관의 정보수집 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어쨌든 27살의 여인은 시부모로부터 독립을 권고받는다.
"네가 우리랑 같이 살아봐야 굶는 고생밖에 더 있겠냐. 딸 둘 데리고 나가서 살면 하다못해 옆에서 도와주기라도 할 거다."다음날 시부모님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쌀 한 가마니를 실어 와서 이것밖에 줄 것이 없다고, 미안하다면서 어서 가라고 했다. 그 쌀 한 가마니를 우마차에 싣고 읍내까지 가는데 우마차 삯으로 한 말을 주고 나니 아홉 말이 남았다.
인생이란 어찌 이렇게도 눈물겨운가눈물을 따 써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도 없는 눈물을 바닥이 보일 때까지 아이들 몰래 밤마다 흘렸던가 어쨌던가. 눈이 퉁퉁 부어서 아이들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엄마는 일어나서 앉았다. 그리고 묻고, 또 묻기를 되풀이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농사도 지을 줄 모릅니다. 땅도 없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두었지만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는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 책을 읽을 줄은 압니다. 책을 읽고, 그 책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일은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며칠 뒤에 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결연한 자신감 하나만 갖고 <도산국민학교> 교장실을 찾아간다. 저를 선생님으로 써 주십시오. 무턱대고 찾아와서 교사로 채용해 달라는 젊은 여인을 교장 선생님은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본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나중에는 종교적인 어떤 숭고함으로, 시선을 피할 수가 없는 채로 한참을 보고 있던 교장은 책상에 수북이 쌓인 봉투를 가리킨다. 이게 다 교사로 채용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와 이력서들이라고, 그런 설명을 한 뒤에 교장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이렇게 해서 선생님 생활을 하게 된 이초순, 그는 며칠이 안 되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댄다. 하루 학교에 나오고 사흘 결석을 하는 학생들, 결석이 싫은 학생은 아이를 업고 와서 수업분위기를 망쳐놓기 일쑤고, 이것이 뭔가.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참을 수 없다는 심사인 채로 그는 교실을 뛰쳐나와 농촌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시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시골을 잘 몰랐던 그는 이제야 시골을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그 결과 교과서 공부보다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경성가사학교 시절에 배운 것을 응용해 보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교장선생님의 동의를 얻고 결재를 받아 교실에 미싱을 들여놓게 되는데, 학생들에게 양재기술을 가르친다는 이 아이디어는 생각 이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인근 마을의 아낙네들까지 몰려와서 학교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게 되는데, 급기야는 여기저기 다른 학교에서 특강 요청까지 들어온다. '내 학교' 아이들 가르치랴 '남의 학교' 아이들 가르치랴 자동차도 많지 않은 시절에 날마다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곤 하는 이초순, 그는 어느 날 학교를 그만두고 읍내로 나가서 아예 양재학원을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해서 그는 절차와 규칙을 따라야하는 학교라는 한정된 틀을 벗어나서 보다 큰 바다로 뛰어든다.
돈이 자꾸 따라오네? 어떻게 하지?양재학원은 대성황이었다. 정읍에서도 수강생이 오고, 장성에서도 몰려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일제 때 배운 것을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는 것이 아니라 매주 한 번씩 서울행 기차를 타고 가서 더 큰 학원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배워오기 때문이었다.
학원을 수료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도처에 양장점을 개업했다. 그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개업하는 곳은 빠지지 않고 찾아가서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 어느 날 제자가 운영하던 양장점 하나가 문을 닫게 되었다.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그는 양재학원 부속 시설로 그 양장점을 직영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뒤에 직영 양장점에서 가까운 이웃 몇몇 아이들에게 교복을 만들어서 입혔다. 이 교복의 디자인이 신선했던 것일까. 아니면 실용적이었던 것일까. 이 사람도 한 벌, 저 사람도 한 벌, 생각지도 않은 교복 주문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학교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왔다.
이 학교에서도, 저 학교에서도, 해가 갈수록 주문양은 늘어났다. 양장점은 이제 양장점이 아니었다. 공장이었다.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돈이 갑자기 마구 들어왔다. 어린 딸들과 살고자 해서 일을 시작했고, 일을 하다 보니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띄어 다른 일에 손을 댄 것일 뿐이었다. 그 행로의 어디에도 돈이라는 글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워진 그는 먼 옛날에 남편과 주고받은 편지를 꺼내서 읽어보는 것으로 마음의 평정을 얻곤 했다. 그러나 가슴 속 저 깊은 고민은 커져만 갔다. 그야말로 번민의 나날이 몇 달간이나 이어졌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지? 어떻게 하지?
아아 그러자. 학교를 세우자. 어느 날 새벽의 별빛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을 보다 깊이 그리고 넓게 전개시켜 보니 문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학교를 세우자면 돈을 더 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학교를 세우자면 돈이 훨씬 더 많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지?
이 새로운 갈등의 와중에 발견한 것이 고아원이었다. 아니, 고아원이라기보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교회의 목사님이었다. 목사님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여기저기에 많은 빚을 안고 있었다. 사흘이 멀다고 빚쟁이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심지어는 얻어맞기까지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 때문에 죽을 때 가장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