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서 쓴 시들이다. // 비가 내리고 / 눈이 내렸다. // 사랑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다. / 그것이 나의 出世(출세)" - '시인의 말' 모두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추억이란 물고기를 낚고, 또 하나 새로운 고향인 아프리카에서는 가난을 주무르고 있는 시인 황학주(56)가 여덟 번째 시집 <노랑꼬리 연>(서정시학)을 냈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이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사랑을 밑그림으로 깔고, 그 위에 고흥 이야기와 아프리카를 덧칠해 추억이란 안개로 마무리했다.
'고향' '노랑꼬리 연' '어느 목수의 집짓는 이야기' '발포 해변' '밤 개펄' '하늘호수' '자작나무 날개' '빨간 길 웅덩이' '아프리카 집시의 어느 아침' '봄이 돌아온 바다의 어느 거북 이야기' '아담, 너는 어디에 있었나' '우연에 가까운 사랑을 미루면 어떤가' '발목 지고 가는 코끼리 발목이' '그대라는 간격' '그 바닷가 수양버들' 등 61편이 그것.
시인 황학주는 "시를 쓰지 않으면 백수건달이 된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부터 글을 쓰려 했던 것이 아니라 책을 좋아했던 것이 먼저였다"라며 "책을 읽다 책에 코를 박고 자는 일이 많았다. 어느 순간 책을 읽는 외로움이 글을 쓰는 외로움으로 이동했다고 할까"라고 시를 쓰게 된 까닭을 귀띔한다.
그는 "중년의 시인이 되었다. 사막을 봐버린 중년에게 환각처럼 찾아온 것은 죽음이다"며 "사막을 죽음을 설계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세상이 지워진 새로운 무대 같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는 "죽음을 설계하는 데 필요한 재료는 사랑"이라며 "이번 시집은 이전의 어느 시집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요소를 보탰다. 평자들은 애매성 혹은 모호성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반대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왜? 황학주 시인이 쓴 시는 애매하거나 모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말해진 뒤에 말해지지 않은 것, 남는 게 없다면 시적 함축이란 무슨 말이겠는가. 그건 또 나에 대한 독자에 대한 일종의 질문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때문에 "가끔은 진짜로 시를 이해하고 싶어진다"고 덧붙였다.
뒷꼍 대숲에 할아버지는 항상 와 있었다
길게 찢어지는 샛강 한 가지를 잡고
가족들은 집에 모였다
경위야 어떻든
달빛이 모지랑이붓처럼 사르륵사르륵 길을 쓰는데
식모살이 간 생이 제일 늦었다
아버지까지 모이자
하류를 향해 쉼 없이 희끗희끗한 소리를 띄워 보낸 어머니는 분을 풀었다 -126쪽, '샛강 마을' 몇 토막
샛강이 흐르는 곳에 있는 작은 마을 어느 집에서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족들이 모여드는 모습이 마치 한 폭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길게 찢어지는 샛강 한 가지"는 샛강 옆에서 태어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빛이 모지랑이붓처럼 사르륵사르륵 길을 쓰는데"는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달빛을 등불로 삼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으로 하나 둘 찾아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제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자고 / 처음에 내가 말을 꺼냈고 / 나중에 배꽃 같은 눈이 그럴 듯하게 떨어지다가"는,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자는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저마다 "잘 때가 되자 모두 그만두자며 / 말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기 싫다는 투다.
그렇다. 글쓴이가 고향 창원에 내려가 제사를 지낼 때에도 가족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조상님 제사 지내는 것도 우리 대가 아마 끝일 거"라고. "제사를 지내주는 대리인에게 돈을 주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냐"고. "온라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저 아이들이 제사를 지내기나 하겠냐"고.
요즈음 시골에서 제사 지내는 모습을 사실 그대로 시란 붓으로 그려낸 시인 황학주. 그는 말한다. "뒷꼍 대숲에 할아버지는 항상 와 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구름, 구름으로라도 참새, 참새로라도 자손에게 바라는 바 없으니 와 있었고 / 대숲 바람소리 내는 것도 별 뜻 있지 않았다"고 쓴다. 제사는 자손들이 조상을 섬기는 '정성'이란 그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떠 있는 달을 기다리는 시인
"언제나 사막 앞에 있다는 예감을 가지고 산다. 그것은 슬프기도 하지만 세월을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문학이란 유한하면서도 사막처럼 텅 빈 생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사랑이 없다면 무슨 수로 죽음과 동행할 수 있겠는가. 삶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의 마음이 오가는 사랑, 나는 이번 시집에서 그런 사랑을 이야기했다." - 황학주
지난 3월 19일(금) 황학주 시인 '노랑꼬리 연'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시인 김도경(한국여성문예원 원장)은 "언제나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사는 우리들"이라며 "오늘 뜻 깊은 이 자리를 기다려왔다. 이 땅에서 기다리는 일도 벅찬데 멀리 아프리카까지 가서 더 멀리 떠 있는 달을 기다리는 시인이 황학주"라고 축하인사를 건넸다.
이 시집 해설을 쓴 이경호는 "그는 '도상의 시인'이다. 그의 삶은 늘 길 위에서 받은 '상흔'의 집적과도 같았다"라며 "그의 몸은 이제 고흥에서 고요함을 눈여겨보고 있다. 고요함을 눈여겨보는 마음 속에서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떠돌던 외로움을 묻어놓을 '장례지'로 그의 처소가 자리 잡는다"고 평했다.
시인 황학주는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갈 수 없는 쓸쓸함>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루시> <저녁의 연인들>이 있으며, 시선집으로는 <상처학교>를 펴냈다. 지금 아프리카민간구호단체 피스프렌드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1회 서울문학대상, 제3회 서정시학 작품상을 받았다.
시가 나 대신 욕을 먹는다
다음은 지난 3월 19일(금) 혜화동에 있는 자그마한 주점에서 황학주 시인과 만나 술잔을 주고받으며 나눈 일문일답이다.
- 시를 처음 쓴 때는 언제인가?
"처음 쓴 시는 숲길에 관한 것이었는데,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었지만, 그 시로 상을 받아 내가 비가 오면 비를 다 맞고 다니고 눈이 오면 눈을 다 맞고 다닌 것을 묵인하셨다. 모든 게 궁했던 내 처지에서는 그런 용납이 용돈보다도 유용했다. 내 기억 속 저녁 빛의 아름다움은 그때부터였다."
- 시는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시는 무슨 거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소하고 애매하고 미완성적인 것으로서 내게 소중하다. 다만 그게 시인 이상 당신의 상상력을 고무시킬 수 있어야 하고 스스로 시만 쓰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갈망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여간 시는 내 사랑이면서 어떻게 나에게 귀한 것이 되었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운명적인 것이며, 사랑은 대체로 운명적으로 왔다 간다."
- 어떤 때 시가 찾아오는가?
"내 속에 시가 없을 때 허둥지둥 시가 찾아진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 것처럼. 내 속에 그런 갈증이 있을 때 시가 쓰여진다. 내 속에 시가 떨어지면 길가다 멈춰서고, 뒤돌아가고, 책상에 앉아 시를 쓰는 것이다. 시란 '그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시 속에 숨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앞세우는 시 뒤에 숨을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시가 대신 욕을 먹기도 한다. 시가 욕을 먹어주기 때문에 나는 시를 정복할 수가 없다."
- 고향 고흥은 어떤 곳인가?
"내게 있어 고흥은 땅끝마을 사람들의 노래와 같다. 늙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바다의 방종함과 나른함과 두려움 같은 것을 홀로 지키며 같은 것을 좋아하고 같은 것을 먹고 사는 모습이 있고, 그것은 내게 말없는 춤으로 다가온다. 그런 노래와 춤은 끝끝내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동지적 갈망을 요하는 시의 숙명과도 연대한다. 시를 쓰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시의 고독에 영감을 준다."
-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아프리카는 시인에게 어떤 곳인가?
"내게 있어 아프리카는 강박이 없는 세계, 그 자체다. 새로움과 낯섦이 공짜에 가깝고, 불충분성, 애매모호성, 아픔 같은 게 내게 있거나 닮은 것들이다. 사람에 대한 자연에 대한 추구 없는 시는 내용성을 갖기 어려운데, 이런 추구가 상투적 자기복제에 갇히는 일을 가장 빈번하게 허용하는 세계, 그게 바로 '강박' 아닐까. 아프리카에서 나는 무엇인가 이해했다는 기쁨을 맛보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직 다 알지 못한다."
- 끝으로 한마디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를 쓰면서 한걸음씩 늙어갈 수 있으니 좋다. 아무리 창의적인 작품이 나온 경우에도 누군가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더한 것이고, 시와 나는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 걸음엔 끝이 없으리라."
2010.04.03 16:15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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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꼬리 연
황학주 지음,
서정시학,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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