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잘 허야지, 제삿날 백번 가믄 뭐혀"

'6년 만의 외출' 두 번째

등록 2010.04.17 12:31수정 2010.04.17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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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의 외출' 첫날(5일)은 아침부터 가슴이 콩닥거렸고, 조금은 긴장도 되었다. 전날 저녁에도 취중이었지만, 세면도구와 내복, 운동복 등 여행준비를 해놓고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는 카메라와 수첩, USB(외장 하드), 가방 등을 챙기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돌아오는 날을 정하지 않고 떠난 여행은 지난 2004년 10월 큰 누님 덕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갑자기 집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중간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미련이 남아서일까? 노인성 치매로 병원에 입원 중인 큰 누님이 생각나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아마추어 사진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30년 전, 큰 누님과 속리산 가는 버스에서
아마추어 사진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30년 전, 큰 누님과 속리산 가는 버스에서 조종안
아마추어 사진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30년 전, 큰 누님과 속리산 가는 버스에서 ⓒ 조종안

 

부산에 살던 6년 전 10월 어느 날, 지금은 동생도 몰라보는 큰 누님이 아파트로 찾아왔다. 누님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형님이 사는 군산에 가자고 제의했다. 추석에 부모 산소에 성묘 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살아 있는 형님 생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갈 형편이 못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큰 누님은 "돈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디, 차비랑 모든 비용은 내가 댈 테니까 댕겨오자. 지금 잘 허야지 제삿날 백번 가믄 뭐 허냐!"라며 동행할 것을 권했다.

 

아내와 상의한 나는 돌아올 날을 정하지 않고 출발하기로 했고, 큰 누님은 21일 오후 2시 버스를 타야 한다고 당부하고 돌아갔다. 여행을 떠나던 2004년 10월 21일은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관습헌법' 논리를 내세워 위헌 결정을 내리고 발표하는 날이어서 기억이 더욱 생생한 것 같다.   

 

당시 부산 노포동 시외버스 대기실은 상식과 이론에 생소한 관습헌법과 경국대전을 근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많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던 헌법재판소 발표를 보려고 TV 앞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붐볐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큰 누님과 동행하게 된 나는 고향방문과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큰 누님은 추석에 먹다 남은 송편까지 비닐봉지에 담아와 먹어보라며 권하면서 커피도 빼주고, 두유를 사 와서는 몸에 좋다며 귀찮을 정도로 마시기를 권했다.

 

그렇게 다정하던 큰 누님이 노인성 치매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보며 당시 베풀어준 호의가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아를 상실한 누님을 만날 때마다 삶에 대한 회의감에 젖어들곤 했다. 그러니 여행을 앞두고 이런저런 일들이 떠오를 수밖에.

   

# 산뜻하게 출발한 여행 첫날

 

청명(淸明)이자 식목일인 5일 산소 일을 마친 오후 5시쯤 셋째 누님 집에서 만나 사돈(매형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발했다. 곁에 친구 같은 누님이 둘이나 있으니까 재미도 있고 든든했다. 나와 동갑인 사돈이 길을 잘못 찾아 1시간 가까이 헤맸지만, 즐거웠다.

 

길을 잘 모르는 국도를 이용하는 바람에 이정표를 잘 못 보았던 모양인데, 사돈이라서 함부로 농담을 하거나 놀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누님들과 시시덕거리는 재미는 코흘리개 시절 동네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기분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젓갈로 유명한 강경을 지나는데 막내 누님이 옛날 생각이 나는지 "집에 자주 왔던 화양 할아버지는 강경을 '갱갱이'라고 혔지!"라고 하니까 셋째 누님은 웃으며 옛날에는 '논산'을 '돈산', '김제'는 '징게', '익산'은 '솜리'라고 했다면서 말을 받았다. 

 

칼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입춘(立春)이 지난 지 두 달이 되도록 봄다운 봄을 느끼지 못하다가 차를 타고 나오니까 가슴이 탁 트이면서 생기가 돋았는데, 야윈 들판을 파르스름하게 덮어가는 온갖 나물들의 향기를 만끽하며 여행을 즐겼다.

 

일곱 살 때 군산-익산을 걸어 다녔을 정도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는데, 여행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충남 서천에서 부여까지 40km가 넘는 거리를 한나절에 걸으며 자연과 친구가 되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산과 여행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게를 돌봐주던 큰 누님과는 여행이나 등산을 자주 다녔다. 그런데 먹고 살기 바빴던 다른 누님들과는 여행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이번 여행은 남다르게 느껴졌다. 특히 유방암에 이어 자궁암, 폐암 수술까지 마치고도 남편의 보살핌 속에 의지로 버텨내는 막내 누님과 함께 나들이를 하다니,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택 막내 누님 집에는 밤 7시 40분쯤 도착했는데, 형제들이 모일 때마다 부엌일 담당이었던 셋째 누님이 찰밥을 찌고 나물과 찌개 등을 만들어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운전하느라 고생한 사돈은 저녁을 먹고 9시쯤 돌아갔고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한쪽에서 뭔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메모하던 매형은 쪽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한 번 나가면 3-4시간은 걸어야 하기 때문에 매일은 못 나다닐 것이라며 가고 싶은 곳을 골라보라고 했다. 열 군데가 넘는 관광지와 명소를 적어놓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웃음이 나왔고 한편으로는 꼼꼼하게 챙겨주는 정성이 고맙기도 했다.

 

넷이 둘러앉아 여기다 저기다, 오늘이다 내일이다, 가겠다 못 가겠다, 등 의견이 분분했으나 바깥 외출은 7일부터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막내 누님이 항암주사를 중단해도 괜찮은지 검사하는 날이 5월 초여서 무리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매형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밤 11시쯤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니까 속도가 너무 느려 해볼 수가 없었다. 출발할 때는 그날그날 느꼈던 점들을 기사로 작성하려고 준비를 해왔는데 이미지 한 장을 올릴 수 없을 정도여서 계획을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여행 둘째 날

 

둘째 날인 6일은 아침에 눈을 뜨니까 조기를 기름에 튀기는지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다른 생선과 달리 조기는 싱싱할 때 요리하면 고소한 냄새가 입맛을 당기지만, 그렇지 않으면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금방 구별할 수 있다.

 

 텃밭에서 아기배추를 솎아 바구니에 담고 있는 막내 누님. 유방암, 자궁암, 폐암 수술을 받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누님에게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낸다.
텃밭에서 아기배추를 솎아 바구니에 담고 있는 막내 누님. 유방암, 자궁암, 폐암 수술을 받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누님에게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낸다. 조종안
텃밭에서 아기배추를 솎아 바구니에 담고 있는 막내 누님. 유방암, 자궁암, 폐암 수술을 받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누님에게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낸다. ⓒ 조종안

 

조금 있으니까 막내 누님이 텃밭으로 나가자고 해서 따라나가 잠깐 사이에 아기 배추를 두 소쿠리나 솎아서 가져왔다. 아기 배추로 끓인 된장국은 어머니가 살아계시던 40년 전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먹던 개운한 그 맛이었는데 밥 한 공기를 게 눈 감추듯 비웠다.

 

점심때는 셋째 누님이 준비해온 녹두죽에 닭백숙을 안주로 어린 쑥으로 담근 약술을 마시며 뽕짝 메들리를 감상했는데, 남진의 '가슴 아프게', 안정애의 '대전 블루스',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 등은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특히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로 시작하는 '대전 블루스'는 옛 급우들과 담임을 떠오르게 하는 추억이 서린 곡이다. 셋째 누님이 결혼하고 가족들이 모인 데서 부를 때 배웠는데 학교에서 오락시간에 불러 선생님과 급우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노래이기 때문이다.

 

 여행 둘째 날 막내 누님 집 거실. 만남 자체가 행복이요 축복이라는 생각에 더는 바랄게 없었다.
여행 둘째 날 막내 누님 집 거실. 만남 자체가 행복이요 축복이라는 생각에 더는 바랄게 없었다. 조종안
여행 둘째 날 막내 누님 집 거실. 만남 자체가 행복이요 축복이라는 생각에 더는 바랄게 없었다. ⓒ 조종안

 

결혼하기 전 부엌에서 밥을 하면서도 노래를 유창하게 부를 정도로 성격이 활달한 셋째 누님은 '비에 블루스' 곡이 흘러나오니까 옛 생각이 났던지 눈을 지그시 내리깔더니 아무래도 노래방에 가야 할 모양이라면서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노래방 못 간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녹두 특유의 그윽한 향과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인 녹두죽은 입안에 들어가기 무섭게 사르르 녹아버려 두 공기나 비웠고, 닭도 어디에서 샀는지 육질이 졸깃졸깃하고 맛도 그만이어서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얼마나 좋았으면 불문율로 되어 있는 '낮술'을 한 병 가까이 마셨겠는가. 맛에 취하고, 흥에 취하고, 술에 취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오랜만에 듣는 경음악 반주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다음날을 생각해 술자리를 일찍 끝내고 휴식에 들어갔다.

덧붙이는 글 2004년 가을 이후 6년 만에 이루어진 외출에서 의왕 철도 박물관, 서울대공원, 옛 친구와의 만남, 남산 한옥마을 탐방, 강정구 교수 강의 참석, 수원 화성 시티투어 등을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6-7회 정도로 나눠 담아보려고 합니다.  
#여행 #누님,매형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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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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