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우 지회장
최규화
식당에서 나와 각자 일정에 따라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김정우 지회장과 둘이 지회 사무실에 앉았다. 아침 식사 자리의 분위기 때문에 한껏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어떻게들 지내고 계시냐고.
"힘들어. 취업이 안 돼. '쌍용자동차'라고 써서 이력서를 넣으면 다 빠꾸 맞는다고. 해고자가 아니라 희망 퇴직자라도 다 똑같아."그렇다고 이력서에 쌍용차에서 일한 사실을 안 쓸 수도 없었다. 그러면 쌍용차에서 일한 10년, 20년 동안 놀고먹었다는 소리밖에 더 되나. 그리고 이력서에 그걸 안 쓴 사람들도 취업에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고용 보험 납입 실적을 조회해서 '쌍용자동차'라는 이름이 나오면 여지없이 탈락시켰다.
지난 여름 77일 동안의 싸움이 끝나고, 회사와 노조는 애초의 정리해고 대상자들 가운데 '반은 살리고 반은 죽이는' 안에 합의를 했다. 그런데 회사가 살려 준 사람들, 자르지는 않고 무급 휴직으로 쉬게 한 사람들도 사실상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들은 어쨌거나 쌍용차에 적을 두고 있고, 회사에서 4대 보험을 내 주고 있기 때문에 휴직 기간 동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공사판을 전전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몇 번이나 김정우 지회장의 전화벨이 울렸다. 법원에서 벌금형을 때렸다는 조합원의 전화였다. 기본이 200만 원, 전과가 없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봐 줘서 150만 원씩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 그날은 쌍용차지부 한상균 지부장을 포함한 조합원 22명의 항소심 재판이 있던 날이었다. 사실 이제 텔레비전에서, 신문에서 쌍용차 이야기가 안 나오니까 우리는 그냥 또 잊고 살았다. 하지만 이미 지난여름에 최루액으로, 단전 단수로, 경찰특공대로, 자신은 노동자의 편이 아님을 증명한 이 나라의 공권력은 아직도 잊지 않고 노동자들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77일의 전쟁... 돌아간 일터는 지옥이었다공격을 멈추지 않는 것은 쌍용차 사측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는 징계를 통해 노동자들을 또 해고했다. 이른바 '산 자'들한테도 77일 동안의 싸움이 끝나고 다시 돌아간 일터는 지옥과 같았다.
"노예로 살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숨조차 쉬기 힘들어. 아침에 우리가 선전전을 하고 있으면 출근하는 사람들이 우리랑 눈조차 마주칠 수가 없어. 아파도 아프다는 얘기를 못해. 정비사업소 안에 옛날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물리치료실이 있어. 그런데 요즘은 아파도 치료를 못 받으니까 물리치료사가 할 일이 없어서 다른 업무를 보고 돌아다닌다니까."정비지회는 특히 더 아팠다. 4500명이 일하는 평택공장의 징계 해고자가 15명인데, 380명이 일하는 정비지회에도 15명이었다. 비율을 따져 보면 비교조차 안 되게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사측은 정비 사업소를 외주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서울은 빼고 부산, 대전, 광주의 세 군데 정비 사업소를 외주화해 버렸다.
쌍용차 정비지회에는 기구한 역사가 있다. 쌍용차 정비 부문이 1990년대 말 대우자동차로 통째로 넘어간 것이다. 그랬다가 2001년 대우차가 정리해고 사태를 겪고 경영이 어려워지자 다시 쌍용차로 돌아오게 됐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두 번이나 대규모 정리 해고 싸움을 겪었으니, 그것 또한 정비지회의 상처가 특히 더 아픈 까닭이었다.
"자본의 위기를 우리가 넘겨받은 거잖아. 빚을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상하이차가 배 째라고 채권단에 떠넘긴 걸 결국 우리가 다 넘겨받은 거야.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권은 또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노동자들을 죽인 거고. 그러니 이 정권하고 한판 붙을 판을 벌여야지. 3년에서 5년은 갈 거라고 봐. 그 정도 갈 거 생각 안 했으면 카센터 같은 거 할 생각도 안 했어."쌍용차서 잘리고도 자동차판을 못 떠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