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 혜영이

어느 시골 촌놈의 반장 출마기

등록 2010.06.02 12:10수정 2010.06.0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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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에 커다란 종이봉투가 보입니다. 예상대로 선거홍보자료군요. 집안으로 들어가 봉투를 개봉하고 그 내용물을 쏟아놓습니다. 시장 출마자, 도지사, 교육감, 교육의원, 시의원에 출마한 분들의 사진과 경력, 선거공약이 펼쳐집니다. 어느 후보자의 공개 자료를 뒤적거려봅니다. 정당과 경력, 재산, 전과기록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병역면제에 5년 동안 세금도 한 푼 안 내고 뭐하고 살았지? 솔직히 이것만 가지고는 누구를 뽑을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하지만 선거기간 동안 나의 귀와 손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눈과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출마자들의 사랑고백에 잠시 취해 버린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행복시 시민 여러분, 저는 이번에 시장 선거에 출마한 강경파입니다. 제가 흘린 땀방울은 다음세대를 위한 나의 헌신이 될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존경하는 망각동 동민 여러분, 저는 이번 시의원에 출마한 소신남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제 아들이 아빠는 꿈이 뭐야?>라고 물어볼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을 위해 내 자식들을 위해 일하려는 꿈을 갖고 나온 저를 실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요. "

 

"저는 나잘란 후보의 남편되는 사람입니다. 이 지역 토박이고 경험과 연륜을 갖춘 준비된 후보 나잘란 후보를 선택하시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버님, 아이들 교육 너무 힘드시죠. 사교육비 부담 없는 가정, 가난한 아이도 꿈을 키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이 사람 노대책 후보 당선만 되면 당신의 주머니를 털어서 이 일을 꼭 이루겠습니다. 저에게 꼭 당신의 귀중한 한 표를 던져주세요. "

 

그동안 얼굴도 볼 수 없었던 숨은 일꾼들이 차도에서 인도에서 골목에서 나를 반겨줍니다. 그리고 깍듯이 인사하고 고운 손을 내밉니다. 명함을 받은 것만 50장이 넘습니다. 현수막이 펄럭입니다. 후보의 대형브로마이드를 설치한 이동트럭의 확성기에서 인기가수의 노래를 개사한 선거송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어떤 후보는 자전거를 타고 자원봉사자와 같이 골목을 누비며 자신의 서민적 이미지를 어필합니다. 도시에 활기가 넘치고 도로마다 후보마다 자신의 꿈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보기 좋습니다. 이런 열기에 휩싸인 대한민국에서 40대 중반의 유권자인 저는, 조금 뒤로 물러나서 나의 투표경력을 한번 되돌아봅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반장, 기숙사 규율부장, 학도호국단 간부, 대통령, 국회의원, 시의원, 동문회장, 조기축구회장, 아파트 동대표, 재건축 위원장, 회사 야유회 추진위원장, 노조위원장 등을 수도 없이 뽑고 또 뽑았습니다. 다시는 투표에 참가 안 한다고 하면서도 선거 때가 되면 나도 모르게 휩쓸려 나를 대신해 일해 줄 사람을 뽑았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뽑았지만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반장으로 당선된 것 외에는 그럴 듯한 경력이 없으니 헛살아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세를 한탄하는 내 옆을 지나가던 집사람이 우울해진 보통 시민에게 한마디 합니다.

 

"당신 그깟 감투 쓰지 못했다고 기죽지마요. 당신은 아버지요 남편이라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잖아요. 세상에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어요? "

"아빠, 좋은 후보가 아니라면 좋은 후보를 골라서 잘 뽑는 사람이 되면 되시잖아요. 이제부터 당신을 우리 집의 대통령 겸 가장으로 임명합니다. "

 

아내의 위로와 딸의 선심이 조금 위안이 됩니다.

 

이제부터 제가 단 한 번 감투를 써본 초등학교시절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는 2년을 멀다하고 부대를 이동하셨습니다. 지금 직업군인들은 주 5일 근무에 대우도 대기업직원 부럽지 않다고 하는데 당시는 아버지 월급이 13000원 정도였는데 쌀 한가마니가 4000원 정도였으니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요즘 쌀 한가마니가 이십 만원 내외니까 최대로 70만 원쯤 되겠지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전학해서 3학년, 5학년 때 전학을 했으니 전학 간 학교마다 새롭게 친구를 사귀고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전학은 서울로 갔습니다. 서울이란 곳은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들과는 분위기부터 달랐습니다. 전학 간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니 베이스볼(야구)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어는 시골에서 쓸일이 없는데 서울애들은 영어를 잘했습니다. 가죽으로 만든 글러브에 공을 던지고 방망이로 치고 생전 처음 듣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스트라익, 아웃, 안타, 홈런, 세잎------."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시골학교에서 짬뿌라는 공놀이를 즐겼습니다. 그것은 말랑말랑한 고무공을 왼손으로 공중에 띄우고 오른 손으로 쳐서 하는 운동인데 글러브나 야구배트가 없는 시골학생들이 야구를 변형시킨 것이지요. 선수가 부족해서 제가 대타로 나가게 되었는데빨래 방망이 같은 것을 들고 타석에 서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을날 허수아비처럼 그냥서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벤치로 불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에 저는 심한 대구 사투리를 썼습니다.

 

아이들은 제가 입만 열면 "와 그러십니꺼, 보리 문둥이" 라고 흉내를 내고 웃었습니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보리 문둥이라고 하는 말은 한센씨병(나병) 환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보리는 경상도의 주작물이고, 문둥이는 문동이가 변형된 겁니다. 한문으로 글월문(文) 아이동(童). 글을 읽은 아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제 짝은 송혜영이라는 아이였는데 이름도 예쁘고 획일적으로 이마와 뒷머리를 일자로 가위질한 머리를 한 시골 계집애들이랑 먹는 것부터 달랐습니다.

 

우리 엄마는 도시락 반찬을 싸주셔도 집에서 먹던 것을 대충 넣어주셨지만 그 애는 멸치를 볶아도 머리를 따고 몸통을 반으로 잘라 윤기가 돌고 모양새 좋게 도시락 통에 담아왔습니다. 우리도 가끔 멸치볶음을 먹지만 머리와 몸통을 통째로 볶습니다. 가끔 그 애의 도시락 반찬은 쏘세지에 계란을 묻혀 프라이팬에 구운 것도 있고, 소고기 장조림까지 한마디로 환상이었습니다.

 

그 애는 시골 촌놈의 눈에도 눈부실 정도로 귀티가 흘렀고 저는 그 애 옆에만 있어도 작아졌습니다. 혜영이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눈을 떼지 않았고 쉬는 시간에도 한마디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지요. 저는 그녀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나의 마음을 전혀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부잣집 딸인 그녀에게 내가 다가설 방법을 찾다가 저는 먼저 내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때부터 밥 먹을 때도 책을 보고, 화장실에서도 책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시험을 치렀고

선생님은 저를 일어나게 하시고 "시골에서 전학 온 석이가 1등을 했다. 너희들도 분발하거라. 알겠지."하시는 겁니다. 아이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혜영이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자기가 먹다 남은 멸치 몇 마리를 저에게 주었는데 세상이 그렇게 맛있는 멸치볶음은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2학기가 되어 새롭게 반장 선거를 하게 되었고 저는 아이들의 지지를 받아서 출마했지요.

 

밤새워 연습했습니다.

"내가 반장이 되면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 몸과 마음을 바쳐서 일하겠습니다.-----"

출마연설을 하다보면 말이 이상하게 바뀌었습니다.

"제가 반장이 되면 혜영이를 위해서 제 모든 열심과 정성을 바치겠습니다. -----."

저는 과반수의 찬성표를 얻어 반장이 되었고 혜영이는 부반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둘이 맡은 첫 임무는 환경미화였는데 붓글씨를 잘 쓰는 혜영이는 내가 쓴 표어를

정성껏 종이에 옮겨주었고 나에게 처음으로 "너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야."라고 말해주었지요. 내 생애에 처음 반장이라는 감투를 썼고, 그리고 그녀가 내 짝이어서 행복했던 시절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갑니다.

 

나는 한 여자 아이의 마음을 사기 위해 반장에 출마했습니다. 이번 선거에 출마한 분들은 어떤 목적으로 출마하셨는지 스스로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며칠 후면 후보자 가운데 당선자와 낙선자가 갈리겠지요. 당신들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출마했고,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유권자의 하나인 저도 나 자신을 돌아보고 무척 행복했노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을 잘 모르고 뽑았는데 생각보다 멋있는 분을 뽑게 되어 기쁘다>는 고백이 우리 입에서 나오게 해주세요.

덧붙이는 글 | 문화방송 여성시대에 방송되었습니다.

2010.06.02 12:10ⓒ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문화방송 여성시대에 방송되었습니다.
#반장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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