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치있던 약수터, 대리석이 망쳐놨네

새로 정비된 천마산 약수터, 예전의 터가 그리운 까닭

등록 2010.06.16 12:02수정 2010.06.1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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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본래 자연은 곡선이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끝이 빤히 내다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모르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묘미다.
- 법정 스님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과 진접읍의 경계에 있는 천마산. 해발 812미터로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는 이 산을 오르자면 어느 정도 등산 실력이 있는 이도 '헉헉' 대기 마련이다. 산세가 험한 편이고 줄곧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런 가파른 산일지언정 '본래 곡선인' 자연인 까닭에 쉬엄쉬엄 오르자면 언젠가는 정상에 닿게 되는 이 산을 나는 사랑해 마지않는다.

곡선의 묘미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그 묘미다.
곡선의 묘미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그 묘미다.김선호

한낮의 기온이 벌써 30도를 웃돌던 지난 일요일도(6월 6일) 천마산엘 오를 심산으로 길을 나섰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뙤약볕 아래서도 제법 등산객들이 붐벼 주차장이 만원이었다. 주차장이 붐빈 이유는 등산객이 늘어난 까닭도 있었겠으나 주차장 한쪽에 위치한 지하수를 받기 위해 찾은 이들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일요일엔 근방의 식당과 교회 차량들이 대용량 물통을 들고 오기 때문이기도 한데, 정작으로 등산객들이 그곳에서 물을 먹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웬만하면 갈증을 견디며 내처 산을 오르게 된다. 등산로 입구에서 500여미터 오르면 약수터가 있는 걸 알기 때문이다. 등산로 들머리부터 줄곧 가파르게 이어지는 이 산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휴식이 절실해지는데 그 곳이 바로 약수터 근처다.

2주 만에 찾은 천마산, 그런데 그 2주 만에 생긴 변화가 나를 놀라게 했다. 약수터가 보이는 언덕이자 예전에 청소년야영장으로 쓰인 넓다란 공간에 들어설 때부터 숲을 울리는 낯선 기계음이 벌써부터 이상한 징조를 예감케 했다.

각진 대리석 약수터, 호젓한 정취는 어디로 갔나


작업중 저 자리에 꼭 정자를 세워야 했을까?
작업중저 자리에 꼭 정자를 세워야 했을까?김선호

전동 발전기를 돌리는 소리였는데 못 보던 정자가 지어지는 중이었다. 그곳은 약수터 바로 옆으로, 두 해 전 등산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폐쇄한 약수터 윗길 대신, 등산객들이 자주 오가는 장소이자 길이 평평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펴 놓고 식사를 하기에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산에 와서 식사를 할 때 흙바닥이면 좀 어떠랴, 매트를 미리 챙겨 온 사람이라면 흙 위에 매트를 까는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그런데 꼭 그곳에 정자라는 인공설치물을 세워야 했는지 의문이다. 우리 동네 산으로서 천마산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사실 매우 불쾌한 생각마저 든다.


흙냄새를 맡기 위해 산을 찾는 게 아닌가. 맨 땅에 엉덩이를 대서 흙이 좀 묻기로서 그게 뭐 그리 나쁜가. 어쩌자고 그곳에 인공설치물을 만들어 주변경관을 망쳐놔야 했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천마산은 1983년 8월 '군립공원'으로 문패를 달았다. 그 사이 시로 승격됐으니 '군립' 대신 '시립'으로 간판을 고쳐 달아야 맞지만 처음 공원으로 지정된 그때 걸린 '천마산 군립공원'이라는 팻말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그곳이 시공유지라는 이유로 시원하게 트인 숲길에 그렇게 정자를 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가 이제는 박물관에나 들어가야 할 '전시행정의 표본'이라면 정말로 우습기 짝이 없다. 게다가 약수터 주변이 야영장 터였고 보면 이왕에 인공 시설물은 숲의 규모에 비해 넘치고도 남는다. 취사 가능한 벤치가 여러 개 있고 야외무대로도 쓸 수 있는 시설물도 있고, 데크라고 만들어 놓은 딱히 기능을 알 수 없는 시설물까지 그 자리에 들어서 있으니 말이다.

거의 제 모습을 갖추고 마무리 공사에 들어가는 정자 옆 약수터는 한술을 더 뜬다. 언제 그랬는지 대리석으로 말끔하게 도배(?) 되어 있다. 상하좌우가 모두 '직선'이다. 둥근 돌확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이루던 예쁜 약수터가 대리석 직선으로 떡하니 들어앉아 있으니 왠지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숲 속의 약수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던 그 전의 약수터(아, 그 평범하게 아름다운 약수터를 미리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를 굳이 고칠 요량이었으면 좀 더 환경친화적으로, 주변과 어울리는 소박한 모양새로 만들어 놓았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약수 pvc재질로 바뀐 천마산 약수
약수pvc재질로 바뀐 천마산 약수김선호

바위를 뚫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던 물줄기를 받아 내던 둥근 돌확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이 치워졌다. 대리석으로 꾸민 약수터 위로는 어디선가 많이 보던 초록색 지붕까지 씌워 놓았다. 그 지붕 역시 주변 풍경과 안 어울리기는 마찬가지다. 주변이 온통 짙은 숲으로 둘러싸여 딱히 햇볕이 거추장스러운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약수터 바닥까지 대리석으로 마감해 놓은 걸 보니 겨울이 미리 걱정된다.

바닥에 물이 얼면 영락없이 미끄럼판이 되리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한데 어째서 그 생각은 못했는지. 더욱 가관은 PVC재질로 대충 잘라 만든 물이 나오는 입구이다. 이쯤에서 원래의 조금 투박하지만 자연 그대로의 바위 구멍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던 예전의 약수터가 더욱 그립다.

지역대표 요구사항이라는데... 여론수렴 하기는 했나

약수터 지붕 상상력의 빈곤을 탓해야 할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약수터 지붕
약수터 지붕상상력의 빈곤을 탓해야 할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약수터 지붕김선호

남양주시청 공원과에 전화를 걸어 약수터 공사에 대해 문의해 봤다. 담당자 왈 "천마산군립공원 정비 차원에서 정자 짓기와 약수터 대리석 공사를 하고 있다, 이건 지역대표들의 요구 사항이었다"고 답했다.

지역대표라면 지역주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천마산을 매일 아침마다 오르내리는 '천마산 아침산악회' 회원들조차도(일반 주민은 물론이고)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대체 주민 여론을 어떻게 수렴했다는 건지 의문이다. 주민 여론을 전부 수용할 수 없다고 해도 부분적이나마 여론을 수렴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대리석 약수터 둥그런 돌확 대신 네모반듯한 대리석으로 도배되 약수터
대리석 약수터둥그런 돌확 대신 네모반듯한 대리석으로 도배되 약수터김선호

또 공사 전후 과정에 있어 공사에 대한 안내를 하는 어떤 표시도 없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도 아쉽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약수터 바닥이 겨울이면 미끄러울 것 같다는 의견에 담당자는 "따로 물받이를 설치할 거"라고 답했지만, 과연 물받이로 그게 가능할지, 원.

위험구간에 손잡이용 말뚝박기는 꼭 필요한 정비사업이었지만, 소박해서 아름답던 약수터는 그렇게까지 반듯하게 대리석으로 도배해 놨어야 했는지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숨 쉴 여유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한 직전의  낯선 약수터를 벗어나 깔딱고개를 향해 간다.

숲까지 점령한 망치질... 고요와 안정은 어디에 

숲의 고요를 깨뜨리며 정자를 짓느라 요란한 발전기 소리도 뒤로 한다.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 그래서 이름도 깔딱고개다. 발전기 요란한 소리도 그치고 숲은 다시 고요를 되찾는다. 산새 소리에 비로소 조금 전에 흐트러졌던 마음도 안정되어 가는 느낌이다. 바로 그런 고요와 마음의 안정이 숲이 주는 커다란 장점이 아니던가.

'온 나라에 건설의 망치질 소리를 들리게 하겠다'던 사람이 새로운 국회의장이 되었다. 지난날 여당 대표직에 있었던 그 사람 말마따나 이미 온 나라는 건설의 망치질 소리가 어지럽다. 크게는 4대강 사업이 그렇고 작게는 우리 동네 산에 세워지고 있는 정자가 그렇다.

시공유지라는 이유로 내가 사는 아파트 옆 공터는 물놀이터 공사가 한창이다. 지금 이 글도 그 공사현장에서 들여오는 공사음을 배경으로 쓰는 중이다. 참 씁쓸한 일이다.

천마산 정상 능선에 오르기 전, 깔딱고개 중간에 또 하나 귀한 샘이 있다. 일명, '깔딱샘'이다. 깔딱, 하고 숨이 넘어갈 듯 고된 오르막에 샘이 하나 있어 숨을 되찾는다. 바위틈에서 물방울들이 솟아나와  샘 하나를 만들었다.

겨우 한뼘이나 될까 말까한 작은 샘이다. 오며가며 등산객들의 갈증을 채워주기에 더 없이 맞춤한 크기다. 오늘따라 '깔딱샘'의 존재가 더욱 소중해 보인다. 바위가 둥글게 파였고 그안에 물이 고여 찰랑인다. 곡선의 묘미는 그런 것이다.

법정스님은 곡선과 직선을 한마디로 요약하셨다. '직선은 조급, 냉혹, 비정함이 특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이다'라고.
#천마산 #약수터 #곡선과 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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