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 앞서 황학주가 어떤 시인인지 훑어보자. 황학주는 우리나라 시단에서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1934, 충남 아산 출생)은 그가 쓴 시에 대해 "한국 서정시의 지류에 새로움을 보탰다"고 박수를 쳤다. 문학평론가 이혜원은 "알몸의 언어로 빛나는 마음의 현상학"이라 그랬고,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매혹적인 애매성"이라 썼다.
작가이자 문학평론가 박덕규는 "서사적 자아의 서정적 발현"이라 고개를 끄덕였고,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한가로운 듯 처연하고 슬픈 듯 아름다운 시편"이라 적었고, 문학평론가 박수연은 "그의 정치학과 미학에 대한 동시적 관심과 성과는 당시 한국 시단의 경향성을 벗어난 희귀한 사례"라고 추켜세웠다.
황학주는 이러한 칭찬을 떠나서도 우리 시단에서 가장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시단에 휘둘리지 않고, 제 나름대로 말없이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홀로서기' 시인이다. 시단에서는 그를 가리켜 '사랑과 상처의 시인, 길 위의 시인'이라 부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아프리카의 시인'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황학주 시인은 언제나 조용하지만 가끔 입을 열어도 말이 느리다. 그와 마주 앉아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고 있으면 문학평론가 이경호가 말한 것처럼 "먼 곳을 돌아온 사람에게서 나는 바다냄새"가 난다. '사랑과 상처의 시인'이란 말처럼 언제나 살갑고도 편안함이 젖은 눈빛과 함께 다가온다. 그가 쓴 시가 다른 시인이 쓴 시와 달리 특별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시인 황학주는 1990년대 들머리께 '국제사랑의봉사단' 이사로 몸담고 있을 때 아프리카 팀장으로 케냐에 봉사활동을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1996년 봄 케냐로 날아가 마사이 도시 카지아도 옆에 있는 꽈리 오지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교장을 맡는다. 문단에서 그를 가리켜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시인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은 18일(금) 저녁, 인사동 한 귀퉁이에 있는 조그만 호프에서 황학주 시인을 만나 나눈 일문일답이다.
아프리카 소녀들 성기 자르는 걸 보고 큰 충격 받아
- 지금 월드컵이 아프리카 대륙 남아공에서 열리고 있다. 누구보다도 그 뜻을 특별하게 느낄 것 같은데 어떤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축구는 공차기 이상의 상징이다. 비닐 끈을 뭉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가난한 이들이 돈이 없어도 할 수 있고 아무 때고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축구는 그들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스며든 스포츠다.
우주를 보라. 궤도 사이를 노니는 공들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축구는 그런 것이다. 희로애락 사이로 아프리카인들이 꿈을 차고 다니는 것이다. 남아공 월드컵이 아프리카인에게 특별한 축제가 되는 이유다."
-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프리카를 다니는 우리나라 사람이 많지 않았을 때인데 어떻게 아프리카에 가서 살 생각을 했나?
"아프리카 곳곳으로 봉사활동을 다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 소녀들의 성기를 절제하는 여성할례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여학교를 세워서 여성할례를 안 해도 되는 그런 울타리를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찾아와서 아프리카에 거주하게 되었다."
- 여성 할례는 그들 관습이다. 그 관습을 반대하는 일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을 것 같다. 학교는 잘 꾸려졌나? 그리고 어떤 학교였나?
"학교 이름은 크라우드스쿨이었다. 여학교에 대한 인식이 안 되어 있어서 할 수 없이 남녀공학인 2년제 기술예술학교로 출발했다. 그 학교에서 그들의 고유어인 스와힐리어와 문학, 민예품, 전통음악과 춤, 회화, 농업, 건축 등을 가르쳤다.
첫 학기를 100명 정원에 17명으로 시작할 만큼 학생모집이 어려웠다. 여성할례를 반대하는 학교라는 이유 때문에 마을 엘더들과 마찰이 몹시 컸다.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런 갈등이 점점 극복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68명이 첫 졸업을 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200명 정원이 넘쳤다."
- 크라우드스쿨에서 교장을 맡았는데, 무슨 일을 주로 했나?
"거기선 교장도 교사다. 내가 가르친 과목은 '놀이'다. 아프리카, 특히 오지마을엔 아이들의 놀이문화가 없다. 놀 거리를 개발하고 함께 노는 것이 내 과목이었다."
"빵 주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들을 대접하는 것 아니다"
- 재미있었겠다. 혹시 아프리카 교과서에 새로운 과목을 만든 사람으로 기록되는 거 아닌가.(웃음) 귀국한 뒤에는 피스프렌드라는 아프리카 구호기구를 만들었는데 피스프렌드도 새로운 뜻을 지닌 엔지오로 알려져 있다. 피스프렌드는 대체 어떤 기구인가?
"이야기를 하려면 길다. 줄여서 말하자면 크라우드스쿨을 한 경험과 그 밖의 아프리카 국가들을 다녀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고 차별화된 원조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도와준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친구가 되자'는 생각을 가진 아프리카 접근방법을 고민해본 것이다. 그래서 피스프렌드의 문화예술적인 방법론이 생긴 것이다. 그들의 문화예술을 함께 즐기면서 사귀고, 친구로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아프리카 접근방법이다. 그런 개념의 프로그램이 바로 난민촌 페스티벌이나 예술학교 건립 등이다."
- 난민촌에서 페스티벌을 갖는다? 뜻밖이며 상식 밖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민들이야말로 빵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아닌가?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래서 구걸이라도 해야 하지만, 그 마음 속엔 인간이라는 자존심과 자긍심을 누구보다도 갈망하고 있다. 그걸 외면하고 빵을 주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에티켓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걸 원한다. 그들이 페스티벌을 원하고, 자신의 슬픔과 한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길 원한다. 스폰서가 아닌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인간으로 대접받기를 소망한다. 페스티벌을 하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고 원조품을 텐트마다 전달하고 환자를 치료해 주는 것이 프스프렌드의 난민촌 페스티벌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원하는 것이다."
"욕심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부패한다"
- 몹시 감동적이다. 탄자니아 현지 신문보도를 보면 피스프렌드가 만들어준 최초 스와힐리어 문예지를 들고 기뻐하는 아프리카 작가들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레세카타타라는 곳에 마사이를 위한 예술공동체를 짓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것인데 어떻게 마련하나? 특히 피스프렌드는 정부와 기업 돈을 받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는데?(웃음)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진 않지만 우리 후원회원 중엔 공무원도 있고 기업가도 있다. 피스프렌드는 아주 작은 기구이다. 처음부터 풀뿌리 엔지오를 지향했기 때문에 후원회원들의 작은 정성을 모아서 작은 일을 한다. 정부나 큰 기업체의 지원을 받으면 쉽게 일할 수 있는 반면에 여러 가지 욕심이 생기기 쉽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좋은 일을 내가 해야겠다, 큰일을 해야겠다,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욕심에 빠지기 십상이다. 욕심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부패한다. 우리는 그해 필요한 예산만큼만 모금하고 모금액이 차면 더 이상 후원금을 받지 않는다. 대신 피스프렌드는 급여를 받는 임원이 없고, 모든 것을 자원봉사로 해결한다."
-올해에만 벌써 세 번이나 아프리카를 다녀왔다고 들었다. 아프리카 구호기구 머리로서 아프리카를 다닌다지만 시인 아닌가. 시인으로서 느끼는 아프리카에 대한 특별한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시인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시인이다. 아프리카를 왜 좋아하며, 아프리카는 황 시인에게 무엇인가?
"기후가 덥고 가난하고 아픔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우리보다 더 특별한 사유, 매혹적인 삶의 태도 같은 게 있다. 난 그런 게 좋다. 우리보다 뛰어난 점들을 갖고 있는데, 배울 게 많아서 아프리카에 간다. 아프리카는 아직 내가 늙지 않았다고 속삭여주고, 더 열심히 살라고 가르쳐 준다. 그리고 아프리카는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연인과 같다."
-아프리카가 황 시인 시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여기는가?
"많은 영감을 주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집 이후 자신의 상처에 함몰되어 있던 나에게 타자를 새롭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진부하고 동어반복적인 진술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사막에 학교를 세우는 것은 척박한 내 삶의 바탕에 시를 짓는 것과 닮았다."
아프리카 시인 황학주가 고흥으로 내려간 까닭?
- 몇 해 앞 고향인 광주 가까운 고흥에 집을 짓고 낙향했다고 들었다. 바다가 코앞에 있는 아름다운 집이라고도 들었다. 소설가 김훈이 "한국에서 가장 장소성이 뛰어난 주택"이라고 박수를 쳤는데 어떤 집이며, 거기서 어떻게 지내는가?
"이제 어딘가 정착해야 할 나이다. 도시에 살다보면 도시라는 특권적 공간에 오히려 시간과 장소를 빼앗긴 느낌이 든다. 고흥이 고향 광주와도 가깝고, 바다가 있고, 서울에서 보자면 멀고 오지여서 좋다. 그 고흥 바닷가 해안선 위에 직접 집을 지었다.
거기서 시를 쓰고 각종 나무와 식물들을 보살피며 산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 서울 피스프렌드 사무실에 나가고, 몇 개월에 한 번꼴로 아프리카를 다니며 살고 있다. 초대하겠다. 한번 놀러 오라. 다도해의 섬들을 씻으며 오는 파도소리가 그만이다. 너무 황홀해서 잠을 못 이루는 밤들이 많다."
- 고흥에 내려가기 전에도 부안, 고창, 강진, 강릉, 제주 등지에서 많이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황시인 시를 읽다보면 바다에 관한 시가 참 많다. 황 시인에게 있어 바다가 자주 나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바다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여러 바닷가를 나처럼 떠돌며 산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바다의 '텅 빔'이 좋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시간의 흔적들이 있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늘 바다가 가지고 있는 애매모호성에 끌린다.
그 빈 공간에 들어왔다 나가는 인간, 파도, 새, 배, 바람, 안개, 태풍 등에 의해서 바다는 늘 새로운 색과 꼴과 이미지로 나타난다. 감각적인 전율이 있다. 그래서 흥미롭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아직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고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 입소문에 시인 고은 선생이 황 시인을 그린 그림이 있다고 들었다. 고은 선생이 그린 유일한 캐리커처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걸 좀 보여 달라.
"1980년대 후반 자주 고은 선생님을 뵈었다. 1990년 어느 날 안성 자택으로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는데 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선생님이 볼펜으로 내 얼굴 그림을 그리셨다. 원고지 뒷면에 그리셨는데 그걸 받아들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이게 그 캐리커처다."
-고맙다. 고흥과 서울, 아프리카를 오가는 황 시인 걸음마에 늘 빛이 가득하시를 빈다. 앞으로도 아프리카를 진정 사랑하는 시인으로, 좋은 시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시인으로 우리 곁에 남아 달라.
2010.06.19 17:45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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