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싣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배달꾼들
김상윤
모두가 '내 탓'인 서글픈 사람들"일한 지 10년 넘었어. 다 자기 하기 나름이야. 나는 버는 거 술 먹느라 다 써서 남은 것도 없어."
거여동에 산다는 50세 김씨는 독신이다. 자기는 그냥 '쫄'이라며 귀찮게 이것 저것 묻지 말라고 했다. 그는 가정이 없다. 가정을 꾸릴 틈이 없었다. 10년 넘게 낮과 밤이 바뀐 작업장에서 일하다보니 사람 만날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돈은 술 마시느라 금세 바닥났다. 철야로 12시간씩 일하고 한달 150만 원을 받지만 방세, 식비를 해결하고 나면 남는 건 하루 소주 한 두병 값이 전부다. 새벽 한시. 그의 이마엔 구슬땀이 맺혔다. 눈을 부릅뜨고 "아 왜 자꾸 도와주는 거야"라며 내친다. 말 좀 붙여보려고 그의 일을 돕던 내가 머쓱하게 물러났다. 그는 손수레가 넘치도록 파를 싣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돈에 너무 연연해서 하면 힘들어서 일 못해.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월급이 올라."
홍천에서 온 박씨는 45세로, 이곳에서 일한 지 13년이 지났다. 사업을 하다가 97년 외환위기 때 망해서 이곳에 온 사람들 중 하나라고 한다. 그는 그래도 가정이 있다. 사업할 때 지금 부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여기 일 하면서 아이도 낳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역시 한 작업장에 정착하지 못했다. 사장과 싸운 적도 있고, 동료들과 다투다 나온 적도 있다. 지금 작업장에서 일한 지는 1년이 넘었다. 아들은 고등학생이다. 언제쯤 한곳에 정착할지 알 수 없다.
"28살 때 빈손으로 서울 왔어. 회사 가서 일해봐야 남 눈치보고 돈도 얼마 못 받잖아. 이건 자기만 열심히 하면 속 편하게 벌어 먹고 살 수 있었거든."
준수 형님의 말이다. 과거형인 이유는 요즘 벌이가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가락시장 같은 도매시장이 몇 곳 없었기 때문에 돈을 쓸어 모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고 봉투치기 일당도 쏠쏠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엔 서울에만도 강서구, 청량리 등 곳곳에 도매시장이 생겨서 나눠먹기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그는 '머지않아 대파도 공장에서 상자에 담겨 나올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야할까?
"동생도 머리 써서 돈 벌 생각을 해야지. 몸 써서 돈 벌기 힘들어."
"나는 친구들도 여기 있고, 몸 쓰는 일도 체질에 맞아서 하는 거지. 동생은 자기한테 또 맞는 일이 있어."
"시장이 원래 냉정한 곳이야. 다들 장사꾼이기 때문에 자기 물건 팔아줄 사람들한테나 잘해주지 동생 같은 일꾼들한테는 막 대할 때가 많아."
김씨, 박씨, 준수형님은 모두 '자기 하는 만큼 벌어가니 열심히 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술 먹느라 돈 못 모으고, 제 때 안 나와서 월급 못 받고, 일 못해서 욕먹는 것은 모두 '내 탓'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사회 구조나 제도에 의문을 품는 것은 그들과 거리가 먼 일이었다. 밤새도록 뼈 빠지게 일했는데 겨우 입에 풀칠 할 정도 벌고, 작업장에선 기계 취급을 받고, 다치거나 병이 생기는 경우에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현실에 대해서 그저 자신의 무능과 불운을 탓할 뿐이었다.
이들 중에는 드물게 성공한 사람도 있다. 기자가 일했던 작업장의 사장은 면실 뽑는 공장을 하다가 망한 경험이 있다. 그 때 부하직원 중 한 명의 아버지가 파 도매상을 했다. 쉬느니 자기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에 배달 일부터 시작했다. 몇 년 지나 파 도매상을 차렸다. 지붕도 없는 맨 땅에 파를 쌓아놓고 파는 일이었다. 비가 오면 천막을 치고 겨울엔 그냥 온 몸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이젠 번듯하게 지붕 있는 사업장을 갖게 됐다. 그런 그에게도 불안이 있다. 재개발, 현대화의 바람을 타고 가락시장이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섭게 불어 닥치는 '현대화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