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보일러가게로 변해 자전차점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만 김태영씨의 선친이 자전차점을 운영하면서 사용했던 망치 등 연장도구 몇 가지와 자전거 판매 1위 상장만이 이 가게가 자전차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태영씨의 선친 고 김백순씨는 일제강점기 시절 자전거 수리 기능을 익혔다. 김씨에게 '제일자전차'점이라는 사업자 등록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선친이 처음 개업한 시점이 언제쯤인지 정확지 않다.
김씨는 "(아버지는) 일본인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아버지는 당시 자전거 직공이었는데,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은 지금도 제일자전차점으로 기억하고 있다"라고 한 뒤 "저도 어릴 때부터 자전거와 늘 붙어 다녔다. 아마 걸음마를 뗀 후 자전거를 만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 자전거는 승용차가 집집마다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귀한 물건이었다. 김씨는 "어릴 때 어깨너머로 아버지가 자전거 수리하는 것을 보고 자랐는데, 그때는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가게는 늘 붐볐다"고 했다.
김씨는 군 제대 후 바로 선친의 가업을 이었다. 직업군인으로 있을 때 익혀둔 기술도 있고, 어릴 때부터 선친에게서 직·간접적으로 배운 바가 있어 일을 익히기란 어렵지 않았다. 가업을 이었으나 김씨가 서른이 되던 1980년, 선친이 작고하고 난 후 그는 혼자서 제일자전차점을 운영해야 했다.
그는 보일러가게로 전환하는 94년까지 제일자전차점을 운영했다. 보일러가게로 사업을 전환한 때는 그가 자전거판매 1위를 기록하던 해였다. 당시 삼천리자전거가 자전거 판매 1위를 기록한 대리점에 주는 상을 받은 것을 끝으로 가게는 보일러가게로 전환했다.
선친이 물려준 '제일자전차'점을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하지만 자전거만으로는 먹고 사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보일러사업을 택했고, 그 후로 가게 한쪽은 자전거가, 다른 한쪽은 보일러가 차지했다.
김씨는 "사실 자전거를 판매하고 수리해주는 일로 버는 소득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자전거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혹은 매우 더우면 타는 사람이 없다. 봄부터 여름까지 한철 장사였다"며 "겨울에 할 수 있는 일로 보일러를 택했다"고 말했다.
그가 보일러 사업을 택한 것은 군에 있을 때 내연기관(=디젤·가솔린 엔진 등) 정비기술을 익혀뒀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친 때부터 인연을 맺고 자전거를 이용하던 사람들이 있기에 자전차점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전차점의 역할은 자연스레 줄고 보일러 사업의 비중이 늘게 된다.
지금은 가스보일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김씨가 보일러 가게를 냈을 때는 연탄보일러와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 모두를 취급해야 했다. 주택 난방이 연탄보일러에서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로 변하는 동안 그의 어깨에 실려 가는 보일러 설비도 같이 변했다.
김씨는 "지금이야 보일러 설비와 부품들이 아주 잘 나오기 때문에 조립만 잘해도 되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보일러 공사 시 관과 관을 연결할 때 쓰는 공사용 테이프가 없어서 당시에는 종이같은 '삼'이라 불리는 것을 사용하기도 했고, 머시닝을 이용해 직접 관을 깎는 일은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특히 겨울에는 새벽 2~3시에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요즘도 겨울철이면 동파사고가 발생하지만, 전 보다 덜하다. 보일러 고장 났다는 전화가 오면 마치 '5분 대기조'처럼 대기 하고 있다가 바로 출동해야 했다.
그는 "'우리 집에 갓난아기가 있는데 보일러가 터졌어요','집에 할머니가 누워 계신데 빨리 좀 와주세요'…. 보일러 터진 집 가운데 어디 안 급한 곳이 있나? 혼자 일할 때인데 오라는 곳은 많고 몸은 하나고, 새벽까지 일 마치면 너무 피곤해 기어 다닐 정도였다"고 전했다.
선친도 아버지도, "아들이 나보다 더 잘해"
이젠 김태영씨도 혼자가 아니다. 2002년부터 아들 보근(34)씨가 가업을 이어 보일러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김보근씨는 보일러 판매에서 시공, 애프터서비스와 출장수리에 이르기까지 보일러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그런 보근씨도 아버지를 통해 보일러 기술을 익혔고, 그 시작은 역시 자전거 수리였다. 아버지 김씨가 선친을 통해 어릴 때부터 자전거를 익혔듯, 아들 보근씨도 아버지를 통해 자전거와 보일러 기술을 익힌 것.
김보근씨는 "아버지가 보일러 일과 자전거 일을 같이하니 바쁘셨다. 그래서 웬만한 자전거수리는 제가 했는데, 초등학교 다닐 때 자전거 '빵꾸(=펑크)' 때워주면 아버지가 50원을 주시곤 했다"며 "어릴 때부터 보고자라서 그런지 연장 가지고 뭐 만지는 게 즐거웠다. 가업을 잇게 된 것을 보면 우리 삼대가 뭐 만지는 기술은 집안 내력인 것 같다. 가업 잇는 것을 숙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런 아들을 보고 김태영씨는 무척 흐뭇해한다.
그는 "제 아버지도 나중에는 저더러 '네가 나보다 낫다'고 하셨는데, 내가 봐도 이젠 보일러 설비기술은 아들이 더 낫다"고 한 뒤 "선친이 농경세대였고 내가 산업화세대였다면 아들은 정보통신세대다. 기록하고 관리하는 것도 나보다 낫고, 회사에서 못 고치는 보일러를 고치는 기술을 보면 나보나 낫다"고 전했다.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보일러 일에 뛰어든 아들 보근씨도 처음에는 아버지한테 많이 혼났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2006년부터 가게를 완전히 제게 맡기셨다. 저도 그 무렵에 일이 손에 익기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그걸 꿰뚫어보신 것"이라고 한 뒤 "이젠 이 일이 내게 천직이다. 할아버지가 아버지한테, 그리고 아버지가 제게 '후대를 위해 살라'고 하셨는데 조금 알 것 같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7.05 17:06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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