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토리> 들어서는 벽에 그려진 그림.
최종규
(1) 새로운 책쉼터가 작고 앙증맞게1995년 가을이 아니었나 싶다. 서울 청파동 숙명여자대학교 들어서는 오르막길 한켠에 있던 헌책방 한 곳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아 숙대 앞은 헌책방이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1994년∼1995년은 대학교 앞에 있던 자그마한 헌책방과 인문사회과학책방이 꽤 많이 문을 닫은 해인데, 숙대 앞 헌책방도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가만히 떠올려 보면, 1995년 한 해에만 서울역 앞 헌책방 가운데 네 군데가 한꺼번에 문을 닫았고, 제가 신문사지국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늘 보던 청량리역 둘레 헌책방 두 곳 또한 갑작스레 문을 닫으며 사라졌습니다.
모르는 노릇인데, 문을 닫는 헌책방 숫자보다 문을 닫는 동네 새책방 숫자가 훨씬 많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든 책을 안 읽는 사람이든 동네에 깃든 작은 책방에서 작게작게 책을 즐기는 느긋한 마음을 하루하루 잃어 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 해 두 해 흘러 어느덧 열다섯 해가 흐른 2010년 1월, 숙대 앞 땅밑 자리에 헌책방 하나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2005년 무렵에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 역 둘레에 헌책방 <우리서점>이 문을 연 뒤 두 번째 헌책방입니다).
이곳은 헌책방이면서 자그마한 문화쉼터 노릇을 하는 곳으로, 젊은이나 푸름이한테 이야기나눔방 구실도 하고, 공정무역 물품 가게와 생협 물품 가게 노릇까지 살짝 합니다.
숙대 앞 땅밑 자리에 새로 연 헌책방은 그리 안 넓습니다. 퍽 작은 평수임에도 요모조모 이 구실 저 노릇을 합니다. 꽤 작은 평수인 탓에 더 많은 책을 갖추어 놓지 못하면서도 넉넉한 책걸상을 마련해 놓아, 책 하나 즐기는 느긋함을 맛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더 많은 책이 나쁘지 않으며, 오늘날은 더 많은 책이 좋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숙대 앞 새 헌책방 <책 잇는 방, 토리>는 더 많은 책으로 더 많은 지식을 나누기보다, 더 알맞춤한 책을 한결 알뜰히 가려서 갖추어 더 즐겁고 속깊이 책과 만나는 길을 열어 놓는다고 하겠습니다.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이나 혜화동 인문예술 책방 <책방 이음>을 보면 책꽂이가 그리 꽉 차지 않는 가운데 책방 한켠에 책걸상을 마련해 놓습니다. 책을 찾아보고 살피는 책꽂이를 더 갖추거나 들이기보다, 책꽂이 몇 군데를 줄이더라도 책손한테 다리쉼을 하거나 '꼭 사들여 읽지 않더라도 책방에 앉아서 읽고 돌아갈' 만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일 텐데, 고작 책걸상 하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쉴 자리가 되겠느냐 여길 수 있으나, 바로 '고작 책걸상 하나'일 뿐인데 애써 작은 책방에 찾아온 사람들한테는 기쁘고 고마운 쉼터가 됩니다.
책손한테는 책걸상 수십 개가 놓인 곳 못지않게 책걸상 하나만 놓인 곳일지라도 얼마든지 쉼터가 되니까요. 한동안 다리쉼을 한 사람은 무릎을 툭툭 치고 일어나 책꽂이 앞에 설 테고, 책꽂이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빈 책걸상에 살며시 앉아 다리쉼을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