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탐독했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가 6월말에 출간됐다.
나는 노 대통령의 죽음 이후 이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에 나온 책 가운데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은 오로지 노무현 대통령이 주목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러 찾아 읽었다. 그 <유러피언 드림>에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말은 이런 것이다.
"유러피언 드림의 세계에서 시민의 행복은 재참여와 재결합의 깊이에 달려 있다. 재참여란 무엇인가? 깊은 공감 속에서 다른 존재에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공감적 경험이다." '깊은 공감'이란 말은 그 뒤 나 개인에게는 중대한 주제가 되었다. 깊은 공감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말을 가볍게 스쳐 보내지 않고 싶었다. 그것은 자연은 어느 것 하나 헛되이 만들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 것이고 동시에 '무고한 아들은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나의 행동과 선택이 다른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심사숙고하려 애쓰겠단 것이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마땅히 주어진 권리처럼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타인의 불행에 어떻게든 나도 관련되어 있다는 걸 결코 망각하지 않겠단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책의 의미가 특별히 강렬했던 것은 그 책을 읽는 내내 어쩐지 나 혼자 읽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들었단 것이다(물론 유령과 함께 읽었단 뜻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죽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노 전 대통령은 어느 페이지의 어느 문장에 깊은 공감을 하며 읽었을까를 끝없이 상상하며 읽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샤르트르가 말한 고매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고매함이란 무엇인가? 샤르트르에겐 신뢰 자체가 고매한 마음이었다. 서로가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요구하는 것이 바로 '고매성의 협약'이다.
읽는 동안 나는 나 스스로 노 전 대통령과 고매성의 협약을 맺으려 했던 것 같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에게 최고를 요구하는 사이라지만 같은 책을 읽는 동안 독자와 독자끼리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나도) 서로 최고의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나는 이 책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를 읽는 동안 책에서 힌트를 얻어가며 저자를 질투도 하며 동경도 하고 뭔가 될 것 같은 예감과 조바심에 흥분해 측근들을 닦달하기도 하면서, 결코 꿈꾸길 멈추지 않으려 했던, 결코 태만하지 않은 노무현의 모습을 몇 번이고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 서거 얼마 후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는데 그 프로그램은 '함께 사는 세상'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선한 타자에게 감탄하기만 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자신도 선하게 살고 싶어 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 "미덕은 그것을 연습해야 한다", 바로 그 문장처럼 일상 생활에서 올바름을 존재 방식으로 자발적으로 택하고 싶어하기 시작했다.
"미덕은 그것을 연습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그리고 다른 어느 때보다 '연대'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노 전 대통령 서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이후의 노무현은 아마도 우리의 본성, 우리 시민 사회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좋은 점을 끄집어 내길 기대했었으리란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를 읽으면 그 느낌은 더욱 명백해진다. 이제 노무현을 애도함은 어느 한 순간의 애틋하거나 안타까운 감정의 상태이기만 해서는 안되고 나의 존재를 옮기는 출발점 혹은 근원을 말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소설 애호가의 입장에서 이 책을 본다면 나는 최근의 화제작 <정의란 무엇인가?>의 한 문장을 인용해보고 싶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이론의 전개자는 매킨 타이어라는 사람으로 그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본다. 그의 이론을 더 옮겨본다면,
"인간은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빛,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 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