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일쯤 전, 그러니까 이제 끝물이구나 여겼던 시절의 익어가는 참외와 노쇠한 넝쿨들
김수복
그리고 그 향기, 익어가는 참외가 자신의 에너지를 어쩌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발산시키는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해서 우두커니 선 채로 코를 킁킁거리는 날이 이틀이었던가 사흘이었던가, 보기에도 이제 수확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지만 차마 그것을 뚝 따낼 수가 없어서 며칠 더 보기로 했는데 그런데 이게 뭐냐. 코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까치에게도 있다는 듯이 어느 하루 이른 아침 마당에서 까치 소리가 요란한 거였다.
일단 소리를 질러대며 뛰쳐나갔다. "저눔의 까치 새깽이덜이" 어쩌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는데 가던 중에 그만 달팍 넘어지고 말았다. 마당에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눈이 뒤집혔다고나 할까,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까치뿐이고, 머릿속의 생각은 오직 다 익은 참외를 '저눔의 까치 새깽이들'이 공격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다 보니 마당에 늘어놓은 화분은 그야말로 안중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화분 하나를 정통으로 밟아 깨버리고, 나는 넘어지고, 까치들은 재미있다는 듯 허공을 선회하며 까작거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더라고, 넘어진 채로 한참을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키득키득 웃어대며 일어나서 앉았다. 앉아서도 한참을 키득거렸다. 내 꼴이 참 말이 아니게 싸구려가 되고 말았다는 부끄러움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까치는 거기에 잘 익은 참외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내서 왔다기보다 참외의 구조신호를 받고 달려온 게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고 있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랬다. 아니 그럴 것 같았다. 참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람이 참외 자신을 수확해서 먹는 것보다는 까치가 먹어주는 것이 훨씬 이로울 터이었다. 사람은 참외 씨앗을 이빨로 깨트리거나 수채 구멍에 버려서 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하게 하지만, 까치는 씨앗을 뱃속에 넣고 다니며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하는 식으로 배설물과 함께 배출해서 그야말로 여기저기 도처에 참외의 종족을 퍼뜨려 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고사리를 꺾는다고 산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호랑가시나무 어린 묘목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정말이지 뒷산에는 호랑가시 어린 나무들이 많고도 많았다.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쳤으나 두 번 보고 세 번 보는 동안 의문이 들었다. 근처에 호랑가시나무는 찾아볼 수도 없는데 이게 뭔가 하는 생각, 그 생각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것이 까치들이었다. 아아, 까치들이 저 먼 어딘가에서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먹고 여기에서 배설을 한 것이겠구나.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갑자기 참외가 이상하게 보였다. 그것을 먹고자 했던, 혼자 먹겠다고 까치를 쫓으러 뛰쳐나왔던 내가 무슨 희귀종인 것 같은 느낌조차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참외를 심은 것은 까치가 아니고 사람이었다. 사람 중에서도 나 자신이었다. 게다가 나는 현금투자에 노력봉사까지 한 사람이었다. 설령 참외가 자신의 권익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자신과 까치 사이의 어떤 암호로만 통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될 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는 한 일단 참외의 소유권자는 참외 자신도 아니고 까치도 아니고 사람인 바로 나 자신이다, 하는 이런 도덕적 법률적 이론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이 제법 편안한 마음으로 참외를 독식할 수 있게 되었다. 참외가 혹시 개똥을 너무 먹어서 개똥 냄새를 풍기면 어쩌나 하는 바보 같은 걱정도 처음에는 있었지만, 개똥 냄새는커녕 단내만 물씬물씬 풍겼다.
물론 다소의 불편과 손해는 감수해야 했다. 참외가 아주 농창하게 익기를 기다리다가는 까치에게 선수를 빼앗길 염려가 있으므로 미리서 따 버리는 그런 손해와 불편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보름도 아닌, 무려 한 달여에 걸쳐 참외를 평균 하루에 한 개 혹은 두 개씩 참으로 맛나게 먹고 이제는 끝났구나, 아쉽다, 하고 있는데 어렵쇼, 이게 또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