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호선 열차 안에 채소 박스를 든 노인이 서 있다.
안미소
[1호선] 낡은 지하철 타고 삶을 여행하는 노인들매일 아침 출근시간,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 1호선 열차는 삶에 대한 사람들의 뜨겁고 치열한 그 무엇이다. 젊은 날 뜨거운 열정을 쏟아 부은 노인들은 다시 그 곳에서 남은 삶의 여정을 이어간다.
오전 7시 10분 경기도 수원의 병점역. 모시 셔츠 차림에 밀짚모자를 쓴 한 노인이 서 있다. 그 옆에는 감자와 복숭아가 담긴 20kg 박스 두 개가 놓여 있다. 반대편 노약자석에도 소박한 시골 분위기를 풍기는 노년의 부부가 앉아 있다. 손에는 이것저것 챙겨 담은 봉지들이 들려 있다. 1호선은 이렇듯 서울 변두리에서 상경하는 노인들의 여정이 담긴 '인생 지하철'이다.
"아이고, 우리 할아버지 조끼 산다고 해놓고 또 까먹어 버렸네."동대문구 신설동역에서 구수한 할머니들의 수다가 열차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세 할머니가 경동시장에서 장을 보고 신대방동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차를 탄 것. 김양순 할머니(72)가 바리바리 싸든 봉지 안에는 쌀보리 한 말과 갈치 두 마리가 담겨 있다. 김할머니는 "동네보다 훨씬 싸니까 가끔씩 친구들이랑 이래 나온다"며 "옛날엔 힘이 좋아서 쌀보리 두말씩도 샀는데 요샌 무릎이 아파서 못 산다"고 웃어 보였다.
김 할머니 일행은 노약자석이 아닌 자리에 앉았다. 김할머니는 "우리가 젊은이들 자리 뺏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면서 "자리가 더 늘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노약자석이 너무 좁다"고 말했다. 한국철도공사에 따르면 1호선 전체 이용객 중 약 14%인 4300여 명이 노인이다(서울역~청량리역 제외한 코레일 구간, 2010년 상반기 자료). 이는 다른 노선에 비해 높은 비중이다.
어떤 이들에게 1호선 열차는 이동수단이 아닌 노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팔토시, 냉스카프 등을 판매하는 상인들에게 그렇다. 경기 의정부시 가능역에서 장갑을 팔던 안아무개 할아버지(74)는 젊었을 때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머리에 파편을 맞아 난 상처를 보여준다. 안할아버지는 국가보훈단체인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에서 활동하다 7년 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안할아버지는 "여기 상인들 대부분은 60살이 넘은 노인들인데 혼자 월세 내고 사는 힘든 사람들"이라며 "정부가 선처를 내려서 우리에게 불법이란 딱지만 붙이지 않으면 이렇게 하루 3, 4만원 벌어도 행복하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낮 12시쯤 가능역에서 우유와 빵으로 점심을 떼운 뒤, 다시 물건을 실은 끌차를 밀고 열차 안으로 돌아갔다.
[2호선] 젊음의 열기 응축... 다양한 문화 행사들
2호선은 유일한 순환선이다. 기점과 종점이 없이 순환되는 2호선은 세대를 뛰어넘어 반복되는 청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퇴근시간대 2호선 강남역 부근에는 학원이나 아르바이트, 저녁 약속을 잡은 젊은 군상들이 몰려든다. 자기 표현에 거리낌 없는 모습이면서도 한편으론 대중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토익책의 무게로 어깨 아래로 늘어진 큰 가방을 둘러메고 한 손에 DMB를 든 남성 옆에는 아이폰으로 트위터에 접속하는 여성이 있다. 소녀시대 이후 유행하게 된 짧은 핫팬츠와 상큼한 샌들은 2호선 여성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차림새다.
"지금 프리버드(홍대클럽 이름)야? 어, 나 한 9시쯤 도착할 거 같아."갈색 머리에 파나마 모자로 멋을 낸 젊은 여성이 친구와 통화 중이다. 홍대역에 가까워지자 화판을 등에 진 미술학원생이나 홍대 문화를 체험하러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 자주 눈에 띈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은 패션 잡지 <보그>의 한국판을 손에 든 채 영어로 수다를 떤다.
그들 중 미국인 사뮤엘(29)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홍대 부근에는 항상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있다"며 "2호선은 홍대와 같은 문화적으로 풍성한 곳들을 연결해 주는 통로"라고 말했다. 온갖 놀이문화가 가득한 도심을 지나는 2호선 열차는 젊음의 열기가 응축된 장소다.
[3호선] 여성이 선호하는 배우자? "3호선 타는 사람들!"
▲퇴근시간대 지하철 3호선 열차 안에 같은 명품가방을 든 여성 두명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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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열차가 압구정역에 가까워지자 열차 안 명품 밀집도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3호선 이용객의 대표격인 '압구정 명품녀'들이 등장한 것이다. 3호선은 각종 성형외과와 현대백화점 본점, 갤러리아 백화점 등이 있는 압구정역과 패션 거리 가로수길이 있는 신사역을 지난다.
명품을 탐색하는 기자의 시선이 끊길 틈이 없다. 한 열차 안에 명품 가방이 얼마나 있는지 직접 세어봤다. 샤넬 2개, 구찌 2개, 프라다 1개 등 총 12개(모르는 명품 브랜드도 있었을 것이다)였다. 평균적으로 1평당 명품 하나씩이다. 압구정역, 신사역을 지나자 명품 밀집도는 다시 하강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대표적 3호선 이용객들은 경기도 일산과 강남, 서초구의 부촌 주민들이다. 확고한 부촌 3각구도를 그리고 있는 압구정동, 도곡동, 대치동 모두 3호선 구간이다. D결혼정보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여성 회원들이 원하는 배우자로 '3호선 타는 사람'을 찾는 경우가 있을 정도. 1등 신랑감들을 보기 위해 퇴근길인 오후 7시, 대화행 열차를 탔다.
종로3가역, 안국역 등 서울 시내에서 일산과 은평 뉴타운 주거지역으로 퇴근하는 직장인 부대가 대거 합류한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 각진 가방, 아무리 봐도 겉모습은 일반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3호선을 타는 직장인들과 다른 노선을 타는 사람들과 차이는 내리는 역뿐이다. 이들은 서울 은평구 불광, 연신내역에서 내리거나, 경기도로 진입해 백석, 정발산역에서 내린다. 반대 방면에서는 고가 아파트들이 즐비한 도곡, 대치역에서 하차한다.
지하철 열차에서 판매되는 물건들 중 비교적 고가(1만원)인 '추억의 올드팝' CD를 파는 상인들은 3호선 약수~교대역 구간에서만 활동한다. 이들은 다른 호선의 상인들처럼 크게 설명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지 않는다. 다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옛날 팝송이 열차 안에 흐르도록 오디오를 켜 놓을 뿐이다. 한 상인의 말에 따르면 "3호선이 다른 라인보다 '하이클래스'라 잘 팔리기 때문"이란다. 그는 "3호선의 특성상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을 틀면 좋다"고 부연했다.
이제 막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는 경기도 원당 뉴타운지역을 지나 종점인 대화역에 가까워지면 열차는 서울 도심의 화려함을 벗어 던진다. 바깥 풍경은 허허벌판으로 변하고, 열차 안에는 소박한 차림의 지역 주민들만이 드문드문 남는다.
이래서 누군가는 서울의 극과 극을 체험하려면 3호선을 타라고 했나 보다. 고가의 명품가방과 호화 아파트, 3호선은 상류층의 삶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모든 열망을 함축한다. 그러나 지하철은 사람들을 욕망의 장소로 안내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계층까지 이동시켜주지는 못한다.
[4호선] 진정한 문화의 공존을 꿈꾸다
▲4호선 안산역사 안에 외국인들을 위한 국제 송금 서비스 광고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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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있는 4호선 이용객을 보려면 안산역에 가야 한다. 경기도 안산시 공단역과 안산역 주변에는 시화공단과 다문화거리가 있어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인이고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사람들도 많다. 안산역 관계자에 따르면 주말에는 이용 승객의 70~80%가 외국인 노동자들일 정도다. 안산역에서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을 위해 중국어, 영어 등 3개 국어로 노선도를 제공하고 있다. 또 이들을 대상으로 한 김장 담그기 같은 문화 행사들도 열린다.
개성과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 역시 돋보인다. 이들은 명동~혜화 구간에 있다. 이 구간으로 가면 과감한 시스루룩이나 에스닉한 의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혜화역이 가까워지면 연극과 공연을 소개하는 팸플릿을 든 사람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대학로 문화를 즐기는 젊은 층들을 타깃으로 하는 각종 연극, 콘서트 광고들도 4호선에서 두드러진다. 서울메트로의 광고대행사인 국전의 한 관계자는 "대학로를 지나는 4호선에 특히 고객을 유인하는 연극, 전시 광고가 많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겉보기에 4호선에는 다양한 문화와 계층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문화는 서로 공유된다기보다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문화'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지만 마로니에 공원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문화'와 안산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다문화'는 엄연히 다르다. '4호선 각 구간의 문화가 열차를 타고 소통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이 서로 문화를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남긴다.
[분당선] 은퇴노인의 여유로움이 흐르는 곳퇴근길 강남구 선릉에서 경기도 보정으로 가는 분당선 열차 안. 노약자석에는 할머니 두 명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밝은 색상의 옷으로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들 손에는 S백화점 쇼핑백들이 한 꾸러미다. 경기도 성남시 이매역에서 한 명이 내리자 남은 할머니는 부스럭부스럭 쇼핑백을 뒤지기 시작한다. 새로 산 블라우스, 치마 등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가격표를 뗀다. 그리고는 백화점 쇼핑백에서 옷들을 꺼내 헝겊 가방에 옮겨 담는다. 집에 있는 딸에게 이날의 과소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당선 열차 노약자석에 곱게 꾸민 할머니 세분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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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에는 은퇴한 노년 인구가 많다. 고가의 실버타운도 많다. 지하철 출입문 옆 양쪽 면에는 노년 인구가 많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광고들이 눈에 띈다. 용인 모 지역의 온천 아파트 광고, 노인 전문 의료원, 새치 커버용 염색약, 은행 환전 광고 등이 붙어 있다.
사각 노트북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책이나 신문을 읽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일하고 서현, 정자역 등 분당 거주지로 퇴근하는 직장인들이다. 열차 한쪽 의자(27석 정도)에 앉은 사람들 중 적어도 10명 이상이 무언가를 읽고 있다. <제갈량 리더십>, <슈퍼리치 투자원칙> 등 자기계발서적들이 눈에 띄고, 무가지도 많다. 일부는 주택관리사 자격증책이나 영어원서 등을 들고 학구열을 불태운다. 분당선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이 자아내는 삶의 여유로가 흐른다.
[9호선] 세월의 흔적 대신 시설의 반듯함이 돋보이는 곳9호선은 서울 시내 지하철 중 가장 최근에 지어졌다. 9호선은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쌓아온 삶의 흔적 대신 시설의 번쩍번쩍함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모든 시설이 깨끗하고 완벽하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신식 지하철이다."호주인 피터(27)씨는 9호선 열차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다. 한국에 여행 온 피터씨는 국회의사당역으로 가기 위해 9호선을 타고 이동 중이다. 9호선에는 피터씨와 같이 국회의사당이나 여의도 한강공원을 찾는 외국인 여행객들이 종종 보인다.
금융경제의 중심지인 여의도역에서 블랙 수트에 구두, 뿔테 안경을 쓴 이아무개(직장인, 29)씨가 탑승했다. 이씨는 9호선을 이용하는 금융권 종사자 중 한 명이다. 말쑥하게 갖춰 입은 금융 종사자들은 최신식 9호선 열차를 더욱 정돈돼 보이게 한다. 이씨는 "9호선은 다른 호선보다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다"며 "다른 호선보다 개인적인 활동이 보장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국회의사당역은 9호선의 역들 중에서도 깨끗한 시설과 잘 꾸며진 내부가 인상적이다. 국회의사당 주변 치안을 담당하는 국회경비대원들의 모습도 국회의사당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5·6·7·8호선,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해야 |
1·2·3·4호선에 비해 길이가 짧으면서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5·6·7·8호선은 대중교통으로서의 존재감이 약한 편이다. 시내에서 시내로의 이동경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탑승객의 개성이 두드러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도심 이동의 측면에 있어 5·6·7·8호선은 골목 구석구석 파고들어 있는 시내 버스에 많은 이용객을 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통 초기엔 후기 노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송 분담률이 서울시의 골칫거리로 줄곧 지적되기도 했다.
안산이나 오산, 의정부, 일산 등지에서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직 고루 발달되지 못한 광역버스 대신 지하철 1·3·4호선을 이용할 근거가 충분하다. 반면 도심에 자리잡은 5·6·7·8호선은 버스라는 경쟁 대체재의 존재가 크기 때문에 유일한 교통수단으로서의 희소가치가 약화된 면이 있다.
대신 5·6·7·8호선은 이동이라는 실용적 필요에 의해 붐비는 1호선이나 4호선과는 다른 신식의 말끔한 시설과 여유 공간을 무기로 문화적 이벤트를 활성화시킬 여지가 충분한 편이다. 6호선의 경우 올 11월까지 각 역에서 중소기업 특허 상품을 소개하는 장소를 마련하기도 해 여유로운 공간을 실용성 외의 서비스로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승객에게 육상교통과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이 노선 사업자의 장기적 숙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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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미소·김혜림·송재걸 기자는 오마이뉴스 12기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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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선호하는 배우자는 '3호선 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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