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넷 할머니가 땡볕에서 불공 드리는 이유

봉은사에서 기도하는 할머니들이 준 영감

등록 2010.08.25 17:20수정 2010.08.2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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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역센터 52층에서 바라본 봉은사 전경
무역센터 52층에서 바라본 봉은사 전경 오문수

참 무던히도 덥다. 시원한 소나기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비는 내리지 않고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된다. 예부터 처서가 지나면 더위가 물러간다고 했는데 올해는 이상기후라 그런지 무척 덥다. 이런 날은 시골농가에서도 함부로 논밭에 나가지 못한다. 더구나 여기는 서울 한복판 삼성동이다.


며칠 전 서울에 볼일이 있어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올라왔다. 말도 많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봉은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잘됐다"며 점심식사에 초대해준 분은 법무법인 화우의 선임 컨설턴트 허선씨다. 봉은사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더니 예약된 식당에서 5분도 안 걸리는 곳이란다. 점심식사 초대 장소로 잡은 곳은 무역센터 52층 마르코 폴로식당.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52층에서 주위를 둘러보다 눈에 확 띄는 한 곳을 발견했다. 아파트와 시멘트 건물 사이로 울창한 숲이 보이고 커다란 대불이 보인다. 물 가지고 온 아가씨에게 물어 봉은사임을 확인했다.

풍수지리는 잘 모르지만 서울 한 복판에 저런 숲이 있었다니 놀랍다.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와 배산임수는 아니더라도 탁한 서울 공기와 무더위를 식혀주는 옹달샘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로를 가로 질러 바로 보이는 진여문
도로를 가로 질러 바로 보이는 진여문 오문수

삼성동.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 이 근방이 아닐까? '바쁘다'라는 이유로 일상생활 속에 묻혀 자신을 되돌아보기 힘든 현대인들. 바쁜 일상을 벗어나 자기 존재와 주변을 돌아보는 자기성찰의 장소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가장 더운 오후 2시에 봉은사를 찾았다. 말로만 듣던 봉은사는 엄청 넓고 정돈돼 있다. 법왕루에는 땀이 비오듯하는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대웅전에도 마찬가지. 배낭을 멘 외국인이 절 구경을 하며 영문 안내서를 열심히 쳐다본다. 저 외국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팔배를 올리는 이유를 알까?


 미륵대불. 1996년에 완공된 봉은사의 성보로 높이 23미터이다
미륵대불. 1996년에 완공된 봉은사의 성보로 높이 23미터이다오문수

 이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불 앞에서 기도를 하는 84세 할머니의 정성은 어디서 올까? 모성!
이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불 앞에서 기도를 하는 84세 할머니의 정성은 어디서 올까? 모성! 오문수

높이 23미터에 달하는 미륵대불 앞으로 간다. 미륵대불은 1996년에 완공된 봉은사의 성보로 1986년 영암 큰스님께서 발원하여 봉은사 사대부중 1만 명 이상의 동참으로 이루어진 대작불사다. 전통적인 백제 계열의 미륵하생적인 신앙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조성되었고, 석재도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익산에서 가져왔다.

미륵전과 대불 사이는 50미터쯤 떨어져 있을까. 지금 시간은 가장 더운 오후 2시. 하루 종일 쨍쨍 내리쬐는 햇빛에 달구어진 대리석에서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올라와 시야를 가린다. 이 무더위에 하얀 옷을 입은 할머니와 또 다른 할머니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다.


가까이 가볼까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판에 씌어진 글씨 '판전'. 어딘가 범상한 것 같은 데 모자를 쓴 스님 한 분이 안내판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호기심이 동한 나도 안내판으로 향한다.

판전은 대장경의 내용을 목판에 글자로 조각하여 종이에 인쇄하도록 된 인쇄용 목재 경전판이다. 일명 장경전·법보전이라 부른다. 법보(경전)는 불교의 3보 중 하나로 불교의 진리를 모아 놓은 곳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으며 1855년 남호 영기율사와 추사 김정희 선생이 뜻을 모아 판각한 화엄경 소초 81권을 안치하기 위해 지은 전각이다.

후에 다시 유마경·한산시·초발심자경문·석가여래유적도 등을 더 판각하여 현재 3438점의 판본을 보관하고 있다. 판전은 봉은사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특히 판전 편액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마지막 글씨로 유명하다.

이 현판의 크기는 세로 77㎝, 가로 181㎝이다. 김정희는 1852년(철종3) 북청의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과천에 있는 '과지초당'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봉은사를 왕래하다가 1856년 10월 10일에 별세했다. 이 현판은 그가 별세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전한다.

 판전.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보인다
판전.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보인다오문수


 '영각'에서 '영산전'까지 이르는 길의 극락왕생 기원등
'영각'에서 '영산전'까지 이르는 길의 극락왕생 기원등오문수

이 현판의 글씨는 어리숙하면서도 굳센 필세를 드러낸다. 특히 '전(殿)'자의 왼 삐침을 곧게 내려 누른 점이 돋보인다. 말미에 "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라고 낙관을 하였다. '과(果)'자는 김정희가 과천에 머물던 때의 별호를 의미하며 꾸밈이 없는 졸박한 글씨에서 김정희 말년의 청정무구한 심상을 엿볼 수 있다.

수련원을 엿보니 "여기가 서울인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조용하고 정숙하다. 돌위에 앉아 땀을 식히고 다시 미륵대불 앞을 거쳐 정문으로 나가다 할머니들을 목도했다. 아직도 뜨거운 대리석 앞에서 향을 사르며 기도에 열중인 할머니들. 이 더위에 괜찮을까. 일본에서는 백여 명의 노인들이 일사병으로 죽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상황인데. 아무튼 뭔가 지고지순한 사연이 있어 저렇게 빌고 있겠지.

"이 뜨거운 대낮에 안 더우세요?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세요?"
"왜 안 덥겠어요. 덥지요. 그래도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러 왔습니다."
"실례지만 연세가 70줄이나 되시죠?"
"하하하. 내가 밖에 나가 맛있는 술 한 잔 살게요."
"그러면 80줄?"
"예! 여든넷입니다."
"할머니 극락왕생은 누가 빌어요?"
"내 극락왕생은 둘째이고, 첫째는 자식들 잘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나오며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병석에 누워 말도 잘 못 하시면서도 집에 갈 때면 "차 조심해 가거라"하시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뭘까? 평생을 짊어지고 갈 짐일까? 아니면 언제나 돌봐야 할 아기일까.

일전에 어느 회사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부하직원의 아들이 잘되자 "나는 대통령도 부럽지 않은데 자네가 부럽네"하더란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자식 키우기는 부모의 무한책임인가? 대학을 졸업시켜도, 취직을 시켜도, 결혼을 시켜도 뒤를 봐주어야 하는 한국의 부모들. 자식 키운다는 것이 성불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약속시간이 있어 선불당 마루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불공 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정하고 진지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교회처럼 학생이나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남자들은 나이든 사람이 아니면 거의 없다. 30대부터 70대까지의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말 안 해도 기도의 대상은 짐작이 간다. 그들의 모습에서 경건함이 묻어난다.

시간이 다 되어 정문을 향해 나가는데 진여문 앞쯤 왔을 때 상수리나무에서 나무줄기가 빙그르르 돌며 빠른 속도로 땅에 떨어진다. 5분 간격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영락없는 새다. 한참을 쳐다보다 나무줄기를 쳐다봤다. 잘려진 끝부분이 칼로 자른 것 같다.

 정문에서 법왕루가는 길에 상수리나무 줄기가 떨어져 있다
정문에서 법왕루가는 길에 상수리나무 줄기가 떨어져 있다오문수


 거위벌레가 상수리나무 열매에 알을 낳고 새끼를 번식시키기 위해  줄기를 땅에 떨어 뜨렸다. 잘린 자리가 칼로 벤 것같다
거위벌레가 상수리나무 열매에 알을 낳고 새끼를 번식시키기 위해 줄기를 땅에 떨어 뜨렸다. 잘린 자리가 칼로 벤 것같다오문수

사진을 찍자 지나치던 안명자씨가 거들었다.

"자연의 가지치기죠. 봉은사의 은덕에 사슴벌레가 가지치기를 하는 겁니다. 봉은사에서 매미가 많이 울죠. 짜르르 하고 우는 것은 쓰르라미이고 바람소리처럼 맴맴맴 하고 우는 것은 참매미입니다. 맴맴맴 하고 우는 것은 가는 여름이 아쉬워 우는 거예요.

저는 부처님상에서 40대 중반의 얼굴을 봅니다. 부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뭘까하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주머니 어서 가서 집안일 하세요'하는 것같아요. 답답할 때 찾아와서 편안함을 느끼고 갑니다. 이 근방에는 일본인, 외국계회사들이 쫙 깔렸어요. 그들에게 우리의 중심을 세워줘서 감사합니다."

나무를 자르는 벌레가 사슴벌레인줄 알았는데 전문가의 얘기로는 거위벌레란다. 전문가의 설명에 의하면 거위벌레는 상수리나무의 열매에 알을 낳고 땅바닥에 떨어뜨려 새끼들을 번식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의 가지치기가 아닌 모성애를 발휘해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뜨거운 열풍도 마다하고 불공을 드리는 모습과 거위벌레에서 모성을 본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네통'에도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희망제작소'와 '네통'에도 송고합니다
#봉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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