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유리가면>을 1권부터 44권까지 며칠 만에 읽어내다. 미우치 스즈에 님은 1976년부터 2009년까지 서른네 해에 걸쳐 그렸는데 나는 고작 며칠 만에 이 만화 한 질을 '아직 연재가 끝나지 않았'다지만 훌쩍 읽어치우고 만다. 1/3쯤 읽을 무렵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제아무리 어느 한 작품을 깊이 새기며 사랑할 수 있다지만 '책을 쓰는 사람' 마음이나 삶이 될 수 없다고.
만화책 <유리가면>에서 '꼬마' 마야를 가르치며 '어른' 마야가 되도록 이끄는 츠기카게 치구사라는 스승은 <홍천녀>라는 작품을 할 때에 스승인 츠기카게 치구사가 선보이는 <홍천녀>가 아닌 어린 마야가 어른 마야가 되며 선보이는 새로운 <홍천녀>가 되도록 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만화책 <유리가면>을 읽는 사람 또한 '미우치 스즈에' 마음이 아닌 '읽는이 아무개' 마음으로 읽을 밖에 없겠지. 아니, 읽으면서 '미우치 스즈에' 마음으로 읽되 '읽는이 아무개' 삶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지. 또는 '미우치 스즈에'라면 이 만화를 어떻게 그리며 어떻게 읽을까 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한몸 한마음이 되어 읽는 가운데, 이 책을 덮은 뒤에는 '무대에서 내려와서(책을 덮고)' 내 삶을 내 나름대로 내 두 다리와 두 손으로 씩씩하게 일굴 때 아름답다는 셈이 될 테지.
만화책 <유리가면>을 들여다보면 온누리에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숱한 연극 이야기가 나온다. 연극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니 세계 명작이라 일컫는 온갖 작품을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명작을 하나하나 들추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만화책 <유리가면>은 오늘날에 이르러 또다른 명작 자리에 들어선다.
이제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을 놓고 <작은 아씨들>이라든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은 작품처럼 명작이 아니라 말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만화쟁이 미우치 스즈에 님은 서른네 해에 걸쳐 스스로 '명작을 낳은 사람'이 되었고, 앞으로 <유리가면> 연재를 마무리짓든 연재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숨을 거두든, 뒷날 수많은 사람들은 이 만화책 하나를 연극 대본으로 새롭게 고쳐쓰며 또다른 무대를 선보일 수 있겠지.
그런데 이냥저냥 <유리가면>을 무대에 올린다면(만화영화로든 영화로든 연속극으로든 연극으로든 노래로든 춤으로든), 이렇게 무대에 올리는 사람은 스스로 명작이 되지 못한다. 아마 수많은 '이냥저냥 작품'이나 '고만고만 작품'이 쏟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이 문득 깨우쳐 '마냥 따라하는 무대'가 아닌 '내 깜냥껏 내 삶을 바친 온 사랑 깃든 새 무대'를 마련하리라 본다.
그때에는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 하나는 다른 한 사람이 새로운 명작을 내놓는 데에 밑거름이 되는 셈이요, 이렇게 <유리가면>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명작이 하나 태어난다면, 더 먼 뒷날에는 새로운 명작 하나를 밑거름 삼아 새삼스럽게 다른 명작 하나 다시금 태어날 수 있겠지.
<유리가면> 애장판으로 13권째를 보면 333쪽에서 마야가 "에? 왠지 나무가 따뜻하다. 나무에게도 체온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맞춤법 틀린 데뿐 아니라 번역이 얄궂다고 느낀 데가 무척 많았다. 이 대목에서는 "에?"가 아닌 "어?"로 적어야 올바르다. 마야는 '문득 놀라'서 한 마디를 절로 뱉어내니까 "에?"가 아닌 "어?"가 맞다. 아무튼, 만화쟁이 미우치 스즈에 님은 곳곳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1권부터 44권까지 언제나 다른 모습 다른 느낌 다른 말마디로 들려준다. 나무가 따뜻하다고 느낀 당신 삶을 보여주고, 나무가 따뜻하다고 느끼며 품은 궁금함과 놀라움과 기쁨을 슬며시 밝힌다.
그러니까 <홍천녀>라는 연극 하나를 놓고 이리도 길며 '하나도 안 길다'고 느낄 만큼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힘이 있지 않느냐 싶다. 이름도 돈도 무엇도 버리며 넋으로 사랑할 짝꿍이란, 남녀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애틋함일 수 없다. 농사짓는 사람한테 흙과 햇볕과 바람과 물과 씨앗과 푸성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한테도 매한가지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어린이와 푸름이라고 다를 수 없다. 저잣거리 장사꾼이라든지 운전기사라든지 정치꾼이라든지 기자라든지 다를 까닭이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을 밝히며 일구는 고운 나날을 맞이해야 한다. 돈바라기 삶이 아닌 사랑바라기 삶이어야 한다. 이름바라기 일거리 아닌 꿈바라기 일거리여야 한다. 내 밥그릇을 채우거나 내 몸값을 높이는 일터를 찾아 대학 졸업장을 챙길 슬픈 우리 삶은 내버리거나 놓아 주고, 내 마음그릇을 갈고닦으며 내 믿음을 북돋우는 일자리를 깨달아 노상 웃고 울며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보여주는 만화인 <유리가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만화책 <유리가면>만 아름다울까. 그린이 미우치 스즈에 님 삶은 안 아름다울까. 아름다운 삶이 아닌 만화쟁이임에도 만화책 <유리가면> 하나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작품과 삶은 다른가. 작품과 사람은 동떨어져 있을까. 작품을 내놓는 사람과 작품을 받아들일 사람은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 아직 애장판으로는 나오지 않고 얇은 낱권으로만 나온 43권(2009년 8월) 137쪽을 보면 '어른이 되어 가는' 마야가 밥 한 그릇을 받아먹으며 <홍천녀>에 나오는 아코야 삶이 되어 "잘 먹겠습니다" 하고 한 마디를 읊고는 마치 부처님과 같은 매무새로 거듭나는 대목이 나온다.
어린 마야는 연극을 하며 '무대에서는 딴 사람 새로운 삶'이 된다는 대목만 어렴풋이 알아차리는데, 차츰차츰 연극 무대 연기란 한낱 연기로 끝나지 않고 어린 마야 삶을 어른 마야 삶으로 이끌어 가는 고마운 벗이요 스승임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마야라는 아가씨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지만, 천재라기보다 맑고 밝은 넋이요 곱고 착한 넋이다. 맑고 밝기 때문에 하늘이 내린 재주를 받을 수 있다.
곱고 착하기 때문에 하늘이 '누구한테나 물려준 선물'을 즐거이 나눌 수 있다. 츠기카게 치구사라는 스승은 자꾸자꾸 "네 안에 있는 홍천녀를 찾으라"고 외친다. "네 안에 있는 홍천녀"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내 삶을 나 스스로 보며 즐기라는 소리이다. 내 삶은 내가 즐길 뿐 누가 즐겨 줄 수 없다. 내가 읽는 책 하나는 나 스스로 내 마음그릇대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읽는 사람일지라도 나 스스로 뛰어난 사람으로 살지 못하면 이 작품 하나가 얼마나 뛰어난지 깨달을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을 보는 사람일지라도 나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손잡지 않으면 이 작품 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없다. 우리 나라에 세계 명작 번역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와 있으나 정작 나라안에 '세계 명작은 둘째치고 국내 명작'이라도 될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운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세계화 시대에 세계 시민이 안 되었'기 때문에 국내 명작이나 세계 명작이 '한글 문학이나 문화나 예술'로 못 나오지는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고 착하며 참된 삶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한국땅 한글 명작이 나올 수 없다. 몇몇 이름난 글쟁이들을 두고 '이제 한국에서도 노벨문학상이 나올 만하지 않느냐?' 하고 떠들지만, 내가 보기로는 이 나라에서 이름난 글쟁이들은 그저 '이름난' 글쟁이일 뿐이다. 조금도 '아름답'지 못할 뿐더러 하나도 '어른답'지 않다고 느낀다. 이래서야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은커녕 국내 명작이 될 수조차 없다. 백 해 이백 해뿐 아니라 즈믄 해를 살아내며 빛날 작품이 명작이다.
오늘 2010년 한국에서 3010년 뒷날에까지 즐거이 읽거나 읽힐 작품으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앞으로 즈믄 해 뒤에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기쁘며 반갑게 맞아들여 읽을 작품으로 무엇을 손꼽을 수 있는가. 줄거리만 재미나면 그만인가. 제법 사랑받으며 100만 권이나 1000만 권이 팔리면 되겠는가. 작품으로도 아름답고 작품을 담은 '말과 글'로도 아름다우며 작품을 빚은 한 사람 삶으로도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명작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유리가면> 애장판 7권 328쪽을 보면 마야가 고등학교를 마치며 졸업장과 사진첩을 '보라빛 장미를 베푸는 분'한테 보내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에 나오는 말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 애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미우치 스즈에 님으로서는 만화쟁이 당신한테 소담스러운 삶을 이 작품 하나에 쏟아부었다. 아니, 쏟아부었다기보다 스스로 만화가 되어 송두리째 내보였다. 이 피와 땀을 읽을 수 있다면 만화책 <유리가면>은 그냥 허울좋이 붙이는 명작이 아닌, 내 삶과 네 삶 모두 아름다이 바라보며 어우러질 길을 붙안는 사랑임을 알 수 있겠지.
나보다 먼저 <유리가면>을 다 읽은 집식구한테 "<유리가면>을 읽은 사람 가운데 이 작품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를 제대로 읽는 사람은 아주 드물 수밖에 없을 듯해요" 하고 말했다. 대학교 졸업장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 삶터인데 뭐. 대학교 졸업장을 고이 가슴에 안을 줄 모르는 한국 터전인데 뭐.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2010.10.11 14:28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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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1
스즈에 미우치 지음,
대원씨아이(만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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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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