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인 23-24일에 전국 간디학교 학부모들이 제천 간디학교에 모였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 간디 이름을 가진 대안학교의 학부모들이 한 자리에 모여 놀기도 하고, 좋은 강의도 듣습니다. 이 날은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인 김규항씨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 주제는 '불안감'이었습니다.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지만 고학년이 되어갈수록 불안해지는 부모들의 마음에는 어떤 이면이 있는지 강의를 하셨습니다. 또 대안학교 부모들을 작정하고 까시기로 하셨는지 얼마전 <한겨레> 사설에 대안학교 부모들의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글도 뽑아오셨습니다.
김규항씨가 쓴 <한겨레> 사설을 일부입니다.
'우리 안의 이명박' 이야기는 교육문제에 대한 내용이 이를테면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을 욕하면서 제 아이의 시장 경쟁력은 알뜰히 챙긴다'는 내용을 보자. 그건 이른바 '2외2공 현상'과 관련한 것이다. '2외2공 현상'이란 <고래가 그랬어> 식구들이 만든 풍자어로, 한국엔 아이를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거나 적어도 외고에 보내는 부모들과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도 어려워 공부방에 보내다 결국 공고에 보내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계와 언론계와 학계에 몸을 두고 문화자본을 행사하는 진보 인텔리들의 아이들은 '2외'에 속할지언정 '2공'에 속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소리쳐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욕하고 학벌주의를 개탄해봐야 대중들에겐 감흥이 없다. '저 사람들 말은 저렇게 하면서 제 자식은 감쪽같이 빼돌리지' 하는 것이다.
'2외'를 벗어난 진보 인텔리 부모들의 관심은 대안학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한국의 대안학교들을 거지반 망가트려 놓았다. 그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그들은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되는가가 목표가 되어버린 교육현실을 뛰어넘어 아이의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까다롭고 섬세한 그들의 취향을 자꾸만 거스르게 하는 공교육 현장을 우회하여 대학에 들어가길 바란다. 말하자면 그들이 대안학교에 기대하는 건 '대안적 삶'이 아니라 '대안입시'다. 대중들이 대안학교를 '귀족학교'라 비아냥거리게 된 건 단지 학비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중적 탐욕에 분이 나서다.
김규항씨는 이 사설을 죽 읽으면서 강의듣는 우리 학부모들에게 소감이 어떠냐 묻습니다. 저는 강한 부정을 하자니 뒷통수가 당기고, 또 그렇다고 긍정을 하자니 고개가 약간 가우뚱해지는 질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안의 진실이 반론을 제기하라고 할 만큼의 순수함을 갖추지 않았기에, 두 갈래길에서 김규항씨의 쓴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플루엔자 들어보셨어요? 부자병이라고 하는 전염병이죠."
김규항씨는 어플루엔자(Affluenza)의 증상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주었습니다.
내가 40대가 되면 적어도 몇 평짜리 아파트에는 살아야 한다.
지금 타고 있는 차보다 더 큰 차를 사야한다.
다른 사람 것과 나의 것을 자꾸 비교한다.
내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관계를 갖지 않는다.
등등의 예를 들었는데, 사실 저로서는 거의 대부분 한번쯤은 생각해봤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금보다 나은 삶의 질을 꿈꾸면서 넓은 집, 좋은 집으로 이사 가기를 원했고(지금도 여전히), 내가 가진 것보다 남이 더 많이 가졌으면 부러워하고(지금도 여전히), 덜덜거리는 엘란트라를 타다가 트라제(물론 미국간 형부가 2년간 빌려준 차지만)를 타면서 약간 나의 신분이 상승됐다는 우쭐함도 맛봤었습니다. 수입차도 아니고 트라제 정도에 말이죠.
어쨌든 따지고 보니 그 어플루엔자의 증상이 고스란히 제 안에 있었는데 그것이 병인줄 몰랐습니다. 강의를 듣다보니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미국화가 되면 될수록 이 어플루엔자에 걸리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 자살률이 높아지겠지요. 자신의 삶에 만족감이 없으니 상대적 빈곤을 끊임없이 느낄 것이고, 그 때문에 우울증은 더 깊어갈 것이고, 자신의 삶이 하찮게 여겨지면서 스스로 삶을 정리하는 것은 빤히 보이는 미래입니다.
"EBS 지식채널에서 여든이 넘은 제주도 해녀할머니께 잠수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것을 채취하지 않겠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해녀할머니는 만약 잠수장비만 있으면 100명의 몫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그럼 장수장비를 사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해녀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답니다. 그럼 99명은 뭐 먹고 사나?"
김규항씨는 이 할머니의 정서가 바로 30년 전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 결이었다고 말합니다. 불과 30년 전에는 이런 마음의 결을 가졌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왜 급속도로 우리는 나와 남을 함께 생각하는 마음의 결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고보니 어릴적 부모님께 공부하라는 말만큼이나 지겹게 들었던 말이 바르게 살라는 말이었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사람 안 되면 다 헛 일이라고 하셨고, 아무개 하면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수 있다는 신뢰를 줘야 한다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말씀 하십니다. 또 남에게 해를 입히고 살면 벌받는다며 집안 사람 중에 마음을 잘못 써서 벌 받은 구체적 예를 제시해 겁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인연과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진보 인텔리들의 이중성과 그 심보
다시 돌아와서 어플루엔자에 걸린 사람들은 대안학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랍니다. 김규항씨는 진보 인텔리라고 하는 인간들이 갖는 이중성, 다시 말해서 자기 아이의 개성을 지켜주면서 좋은 대학을 우회적으로 들어가려는 그 심보에 화가 난다고 합니다.
결국 그 김규항씨의 요점은 대안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마치 진보운동인양 착각하지 말고, 진보 인텔리라 자청하는 너희 스스로를 제발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 상당히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또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는 말입니다.
공교육 부모들은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입시 학원에 집어넣고, 대안학교 부모들은 불편한 얼굴로 입시 학원에 집어넣는다고 꼬집습니다. 그 불편한 진실을 김규항씨는 어떻게 알게되었을까, 싶어 웃음이 났습니다.
어찌보면 그 불편한 얼굴이라는 것을 저도 지금 하고 있으니 뭐라 말할 것이 없습니다. 대안학교를 다니던 둘째 딸이 지금 휴학하고 공부를 해보겠다고 학원에 다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김규항씨는 일반적인 삶의 형태를 기준으로 하니 부모들이 불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들이 정말 불안해 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이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어야 하고, 아이들이 행복할 줄 모르면 어떡하나, 이것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뭐 먹고 살까를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굶어 죽는 빈곤국가가 아니니까요. 이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뭘 해도 먹고 산다는 말입니다. 법륜스님께서 자녀교육에 관한 법문을 하실 때 늘상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 전 대박으로 웃었습니다. 왜냐면 뭔들 하면 못먹고 살겠나 하지만 그 뭘하느냐에서 편하면서 돈은 많이 버는 직업을 선택하려면 선택 폭이 좁다는 속마음을 들켰으니 어찌 안 웃겠습니까.
대한민국 마법의 한 마디, "그래도 현실이..."
대한민국에서 통하는 마법의 한 마디가 있답니다. "그래도 현실이..."라는 말. 진보 인텔리들이 이념, 정의를 논하다가도 "그래도 현실이"라는 말앞에서 무너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강원도 오지에 사는 대치동 주민'(아빠는 귀농해 강원도 오지에 살고, 부인은 교육을 위해 대치동 살고)이라는 유행어가 나옵니다.
"100명의 사람을 태운 배가 지금 침몰하고 있습니다. 99명이 저쪽으로 가면 살 것이라고 몰려가고 있습니다. 나머지 한명은 어디로 갈까요? 99명이 살겠다고 선택한 그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못 갑니다. 99명이 죽음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못갑니다. 불안해서 남들이 가는 길을 가게 됩니다."
대안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나는 침몰하는 배에서 99명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한 그 한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김규항씨의 강의를 들으면서 진보 인텔리의 속성(내가 진보쪽에 가깝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인텔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을 어설프게 가진 것을 깨닫고 그 한 명이 아님을 여실히 알았습니다.
김규항씨의 강의를 듣고 나서 괜히 실실 웃음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저더러 "뭐 좋은 일 있어?"라고 묻는데 좋은 일은 없지만 그냥 행복하단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납니다. 색안경을 썼다가 안경을 벗은 느낌, 깡통을 덮어쓰고 있다가 벗은 느낌, 숨기려고 했던 내면을 들켰지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성찰의 계기로 삼아지니 참 기쁩니다.
휴학한 딸과의 싸움에서 집착했던 나를 만나다
좀더 솔직해져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대면하는 것이 아이 교육의 첫 단추라고 보여집니다. 휴학한 해주와 몇 차례 기 싸움을 하면서 제가 가져던 아이에 대한 집착과 기대하는 마음을 정면으로 보고 나니 힘이 생깁니다.
그 힘 덕분에 김규항씨가 비판하는 그 대열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오랫만에, 정말 오랫만에,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허를 찔리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김규항씨는 단순히 자기 성찰에서 끝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래가 그랬어' 잡지를 전국 공부방에 지원하는 '고래동무'에 함께 해달라고 했습니다. 고래동무는 세상 모든 아이를 내 아이, 남의 아이 구분하지 않고, 우리의 아이로 여기는, 이모 삼촌들의 모임입니다.
고래동무 활동은, 부모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마땅히 누려야 할 아이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사회를 미안해하는 어른들의 반성문이자 더 나은 아이들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적극적인 연대활동이라고 합니다. 전국 공부방(지역아동센터) 수는 3474곳(2009년12월31일 기준)이고 현재까지 2107곳에 <고래가 그랬어>를 무료로 보내고 있습니다.
부모가 돈이 없어 사주지 못해도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고래가 그랬어> 잡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도 고래동무가 되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함께 해서 전국의 아이들이 맘놓고 보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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