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가 운영한 '비닐하우스' 소파 공장
송지혜
7년 전 판교개발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씨는 자신이 이렇게 추락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한때 허름하나마 변두리 가구공장에서 '사장님' 소리를 들었고,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판교 개발이 시작되면서 모든 게 끝났어. 내 사업도, 가족도, 인생도..."그녀는 1999년 무렵부터 판교에서 소파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가구 공장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남편 사업이 무너지고, 갈등 끝에 이혼한 뒤였다. 그 때는 판교에 개발되지 않고 방치된 넓은 땅이 많았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비닐하우스를 짓고 가구 공장이며 화훼 단지 등을 하고 있었다. 김씨는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60만 원에 80평짜리 비닐하우스를 임대해 가구공장을 차렸다.
손재주가 좋았던 김씨는 전국의 술집, 단란주점 같은 곳에 소파를 납품하며 사업을 조금씩 늘려갔다. 80평짜리 공장이 110평으로 늘었다. 살림은 방 두 칸에 마루가 있는 주택을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40만 원에 얻어서 살았다. 아들, 딸과 가끔 외식도 할 수 있었던 이때는 정말 살 만했다고 한다.
그런데 2002년 무렵, '판교 개발로 비닐하우스 공장이 철거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경비업체 사람들이 비닐하우스를 둘러보고 가는 일도 생겼다. 그러더니 성남시에서 불법건물 철거 고지가 나왔다.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증금 내고 임대료 내고 써온 내 공장이 왜 순식간에 철거대상이 되는지, 왜 빈손으로 나가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세든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곧 철거되니 비워 달라고 했다.
불법 건축, 증축물인 비닐하우스는 보상 대상도 되지 않았고, 세든 집을 비우는 것에 대해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거주이전비용으로 7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받고 나면 공장도, 집도 모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대아파트 입주라는 대안도 제시되긴 했다. 신도시가 건설된 후 1억 5000만 원의 보증금을 끼고 월세 48만 원에서 60만 원을 내면 24평에서 30평짜리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 아파트에 5년을 살면 분양권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쥐어짜내려 해도 그런 돈은 없었다. 보증금 1000만 원짜리 집에 살던 김씨에게 1억 원이 넘는 아파트 보증금은 언감생심이었다.
이곳이 유일한 생업의 터전인데, 갈 데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쫓아낼 수가 있는 거냐고 따졌다. 동네 사람들과 뭉쳐서 '갈 곳을 마련해 달라'고 시위도 했다. 그러나 2003년 12월 굴착기가 밀고 들어왔다. 보상을 받은 사람들은 이주를 시작했고, 경비업체 직원들이 남은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김씨는 그래도 버텼다. 2005년 4월, 한국토지공사가 철거용역업체 600여 명을 동원해 남아있던 주민들을 모조리 끌어냈다. 그 자리에 배치된 전투경찰들은 용역업체 직원의 폭력을 묵인하다 못해 돕기까지 했다고 김씨는 몸서리를 쳤다.
"용역 직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쇠파이프로 살림살이를 부쉈어.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고, 주민들을 밟고 때렸어. 그 때 나도 입술이 찢어지고 어깨를 다쳤지. 트럭이 와서 부서진 가재도구를 다 싣고 갔어."김씨는 무지했던 자신을 한탄하고 책망했다. 사람들이 판교 신도시에 대해 웅성거릴 때, 개발이 되면 좋다고 생각했다. 병원도 들어오고 생태공원도 생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주택 세입자이자 불법 건축 공장주였던 그녀는 '떠나 주어야 할' 존재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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