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쉬섬 쇼핑몰에서 찍은 인형. 인형의 모습처럼 이란에는 이런 두 유형의 인종이 살고있는 것 같다. 까무잡잡한 인형은 반다라아바스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아랍족을 닮았고, 하얀 얼굴 인형은 본토에 주로 사는 아리아계통의 페르시아인을 닮았다.
김은주
오전 8시에 빨래를 맡길 수 있다고, 프런트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습니다. 이스파한의 친절한 호텔에서는 손님이 원하면 언제든 맡길 수 있었는데, 이곳은 지정된 시간에 세탁거리를 안고 프런트로 가야 했습니다.
꼬박 하루 만에 침대에 누웠기에 푹 자고 싶었지만, 빨래 맡기는 일에 신경 쓰느라 새벽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눈이 떠졌습니다. 웬만하면 직접 빨겠는데 손도 들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고, 또 화장실 세면대 물은 찔끔찔끔 나오는 수준이라 엄두가 안 났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옷은 세탁이 정말 필요했습니다.
우린 이란의 북부에서 왔는데 이곳은 이란의 최남단으로 우리나라 늦봄이나 초여름 날씨 정도였기에 두꺼운 청바지나 오리털점퍼는 어울리지가 않았습니다. 이곳을 떠나 북쪽으로 떠날 때 다시 입기 위해서는 세탁을 해야 했고, 빨래 맡기는 일이 내게는 절박했습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프런트로 갔습니다.
프런트에는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있고, 양복차림의 남자가 앞에 서 있었습니다. 빨래를 들고 와서 여자에게 '워싱(세탁)'이라고 몇 번 얘기했지만, 내 빨래에 코를 박더니 인상만 찡그릴 뿐 전혀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영어를 전혀 모른다는 걸 마침내 이해하고, 남자 앞으로 가서 다시 '워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남자는 '오케이(좋아)'라고 말했지만 빨래를 받을 생각도 않고, 어디다 두고 가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거만했습니다. 빨래 빠는 데 드는 비용은 얼마고, 얼마 만에 나오는지 이런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서툰 영어로 간신히 떠듬거리며 묻고 싶었던 걸 물었는데 그는 쓴 약이라도 삼키듯 간신히 목구멍을 열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프런트를 지키고 있던 여자와 남자 둘 다 결코 친절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본토에서는 결코 이런 대접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란 본토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말하기 전에 우리의 의도를 파악해서 도와주려고 할 정도로 친절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과분한 이들의 친절에 익숙해진 난 이 호텔 사람들의 냉랭한 대접에 조금 적응이 안됐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불친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란을 여행하면서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 게 문제겠지요.
그런데 프런트 직원들이 거만했던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호텔의 앞뜰로 나왔을 때입니다. 어제는 저녁이라서 잘 보지를 못했는데 이곳에 묵었던 사람들이 아침을 먹기 위해 하나씩 자신들의 방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모두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세련된 양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피부도 윤기가 흐르는 게 부티가 줄줄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호텔에 묵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란의 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내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후줄근했습니다. 프런트직원이 무시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곳 키쉬섬은 이란의 영토이긴 하지만 이란과는 다른 것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이란 본토가 종교의 지배를 받는다면 키쉬섬은 물질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물질주의가 지배적인 곳에서는 천 원짜리 옷을 걸치면 천 원짜리 인간이 되고, 만 원짜리 옷을 걸치면 만 원짜리 인간이 되는데 난 천 원짜리 옷을 걸치고 있었고, 당연히 천 원어치의 대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논리였습니다.
키쉬섬은 이란에서 전략적으로 가꾸고 있는 휴양지입니다. 주로 이란의 부자들과 외국인들을 위한 리조트 단지로 무비자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키쉬섬은 이란이긴 하지만 이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슬람공화국인 이란의 분위기보다는 자본주의 국가의 휴양지에 더 가깝고 또한 이란도 이런 방향으로 키쉬섬을 가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