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섭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장인 29일 오후 법원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이날 키코 관련 소송에서 은행의 손을 들어준 법원을 비판하고 있다.
선대식
"원고의 피고에 대한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29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32부 558호 법정. 서창원 재판관은 이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이날 빼곡히 법정을 채웠던 60여 명의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모조리 다 기각할 수 있느냐", "고민한 흔적이 없다" 등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판결이 끝난 후 법정 바깥에서 만난 기자에게 "사법정의가 사라졌다, 금융기관 손만 들어줬다"고 울분을 토했고, 또 다른 관계자는 "2년 동안 여기에 매달려왔는데 허탈하다, 소송 비용도 다 날리게 생겼다"고 말했다.
이날 558호 법정을 포함해 서울중앙지법 4개 법정에서는 키코(KIKO) 상품으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 118곳이 은행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반환 소송 141건 가운데 91건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이중 중소기업이 일부 승소한 19건을 제외한 72건은 기각당했다.
키코 상품은 환율이 일정 범위 내에서 변동할 경우 처음 계약한 환율에 따라 외화를 원화로 바꿀 수 있도록 한 환헤지(환율 변동 대비) 상품이다. 이 상품의 특징은 환율이 당초 설정해 둔 상·하한선 내에서 변동할 경우 중소기업은 이익을 얻지만, 변동폭이 극심할 경우 큰 손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은행의 공격적인 상품 판매로 2007년~2008년 많은 기업들이 이 상품에 가입했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환율이 요동치자, 기업의 손해가 커졌다. 금융 감독원에 따르면, 2010년 6월 현재 748개 기업이 키코 계약으로 인해 3조2247억 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72% 가량이 중소기업의 피해다.
법원, 은행 손 들어줘... "키코는 불공정한 상품 아니다" 이날 법원은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가장 쟁점이 됐던 키코 상품의 적합성에 대해 "키코 계약의 기본 구조는 구조적으로 불공정하거나 환헤지(환율 변동 대비)에 부적합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법원은 또한 "수출기업들이 (환율의) 일정 구간에서는 당시 선물환율과 시장환율보다 더 높은 행사환율을 보장받을 수 있거나 환율상승에 따른 환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며 "사후 (극심한 환율 변동이라는) 시장상황의 변화만을 이유로, 계약상 책임을 부정한다면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와 민법의 대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은행이 키코 계약 과정에서 기업에 적합한 상품인지 검토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법원은 은행이 고객 보호 의무를 져버렸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이날 언론 브리핑을 통해 "이날 선고는 통화옵션상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판단한 대규모 1심 본안 판결"이라며 "복잡한 파생금융상품과 관련해 금융기관의 고객보호의무를 재확인한 판결이자 규준을 제시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키코 피해 중소기업 쪽 대리인인 김무겸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는 "판결이 기대에 못 미쳤다, 은행의 과실을 인정할 줄 알았다"며 "법원이 중소기업 구제에 소극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올해 2월 키코 관련 첫 번째 판결에서 법원은 "은행이 얻는 이익이 다른 금융거래에서 얻는 것에 비해 과다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어, 키코와 관련해 은행에 유리한 판결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