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현동 철거민들이 버리고 간 가구들
송지혜
집, 아니 한 칸의 방은 내게 늘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과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공기처럼 감도는 공간이었다. 대학 진학과 함께 객지 생활을 시작한 나는 짐짓 '독립한 청춘'인양 보이려 했지만, 실제론 월세 30만 원에 벌벌 떨며 내일을 걱정하는 '궁핍한 젊음'일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찾은 이유서울 생활, 아니 정확히는 서울 근교생활을 시작한 2003년부터 6년간 10번을 이사했다. 집은 사는 곳이 아닌 임시 대피소였다.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 주택의 방 한 칸을 월세 20만 원에 빌렸을 때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존재'여야 했다.
샤워 후 목욕탕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남겨선 큰일 나는 것이었고, 휴지를 쓴 후엔 맨 끝 부분을 삼각형으로 접어두어야 했다. 잠깐 부엌을 빌려 쓴 뒤엔 '사용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메모지가 방문에 붙어 있기도 했다.
부근 심곡본동의 다세대 주택에 살 땐 천장 위로 쥐가 돌아다니는 소리에 밤잠을 설쳤다. 보증금 100만 원, 월세 15만 원의 싼 방을 또 구하기가 어려워 꾹 참았지만, 자다가도 금방 천장이 뚫려 쥐들이 우르르 쏟아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서울 궁동의 보증금 200만 원, 월세 15만 원짜리 옥탑방은 불법증축된 구조물이라 주민등록 신고를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학교에서 가깝고, 싸고, 천장의 쥐 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머무를 이유가 됐다.
불법 구조물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았다. 배달해 주는 액화석유가스(LPG)를 겨우내 쓰는 건 고단한 일이었다. 밤새 LPG 통이 얼어 보일러가 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전기포트에 물을 끓인 뒤 LPG 통에 부어 가스를 녹였다. 그러면 가스레인지가 켜지고 따뜻한 물이 나왔다. 그러나 컨테이너 박스를 대강 세워둔 꼴인 옥탑방에 좀처럼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정이 조금 나은 서울 개봉동 친구네 옥탑방에서 6개월, 혜화동 주택의 친구 방에서 몇 달 살았다. 혜화동에선 창문 틈으로 어떤 남자가 늘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겁에 질렸다. 여자들만 산다는 인터넷 광고를 보고 찾아 들어간 신림동의 지하방은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깜깜한 암흑이었다. 노고산동의 반지하방에선 옆집 남자와 낯선 여자의 신음소리를 일상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런 곳들조차도 진득하니 오래 살 수가 없었다. 재개발 재건축 때문에, 월세가 올라서, 집주인이 바뀌어서, 함께 지내던 친구가 유학을 떠나서, 나는 또 짐을 싸야만 했다.
주거 빈민들을 취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것이 바로 내 이야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넓고 쾌적한 아파트, 밝고 따뜻한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주거 난민들'이 이렇게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을, 그들이 힘없이 신음하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대안을 찾아보고 싶었다.
재개발이 앗아간 소박한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