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 4월 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유성호
지난해, 검찰의 첫 정치보복 수사 때 저는 노무현재단 사무처장 겸 한명숙 공대위 대변인으로 그녀를 도왔습니다. 당사자는 힘들었겠지만, 저에겐 평소 몰랐던 그녀의 인생과 신념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당시 "제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는 말은 그녀의 정직과 도덕을 웅변하는 상징적 한 마디였습니다. 참으로 당당했고, 누구에게 짜증 한 번 없이 침착하게 그 상황을 이겨냈던 그녀였지만, 사람인지라 같은 일을 두 번 겪어야 하는 처절함이 살짝 묻어있었습니다.
양 : "모두진술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한 : "'(노 대통령의 서거 전 정치수사가) 세상을 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런 시간이셨을 텐데, 지금 저도 그렇습니다'고 말했어요. 왜 그렇게까지 말했냐면, 노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이렇게 가셔도 되는 것인가', '버티셔야지, 우리들만 남겨놓고 가셨나'하는 원망 같은 게 솔직히 한 구석에 있었거든요. 그러나 제가 거의 똑같은 일을 당해보니까 그때 대통령 선택하셨던 그 길이 '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구나'라고 이해가 가더라고요. 똑같은 경험 속에 제가 빠져있다 보니."
양 : "이해가 갑니다."
한 : "저희가 돈을 먹고 정치를 한 것이 아니죠. 양심, 도덕, 명예 같은 것이 인생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민들 원하는 기준에서 살아왔다고 자부하거든요. 그것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모욕주고 흠집 내고 도덕성을 추락시키는 음모를 엮고 있으니 견딜 수가 없는 거지요. 아마 노 대통령님도, 당신이 괴로운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주변사람들이 너무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다 보니까…. '그것을 보는 심정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새삼 들어요. 노 대통령 유언의 맨 앞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오죽하면요. 지금 저도 심정이 똑같아요."
양 : "한 번도 이겨내기 힘든 정치적 보복수사를 두 번이나 반복해 당한다는 것이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그런데도 밝고 여유 있는 모습을 잃지 않고 계세요. 무슨 힘으로 버티고 계세요?"
"아무리 뒤집어씌워도 당당하고 떳떳하다" 한 :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심정이 제일 편안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가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았는지 아실 테니까요. 그렇긴 해도, 워낙 터무니없이 당하는 일이고 올가미여서 분하고 마음의 외상도 커요. 저는 지금 보복수사가 '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정권 끝날 때까지 세 번 네 번 올가미가 씌워질 수도 있겠다'는 예감을 합니다."
양 :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세요?"
한 : "네. 하지만, 노 대통령 가신 게 너무 안타깝고 억울한데, 저라도 버텨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노 대통령 가시고 '지못미(지켜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한명숙이라도 지켜야 되겠다는 국민들이 제 주변에 울타리를 쌓고 격려를 보내고 계셔서 그 성원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양 : "과거 유신 시절 구속돼 중앙정보부에서 필설로 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죠. 그때 당했던 끔찍한 고문과 지금의 몹쓸 수사, 어떤 게 더 힘드세요?"
한 : "무서운 고문까지 당하면서 신체적으로나 심리적 공포심으로 보면 그 때가 몇 배나 고통스러웠죠. 그래도 그땐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이 커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거든요. 지금은 '더러운 정치인' '돈 받아먹은 부패정치인' 이미지로 저를 올가미 씌우니까, 어떻게 보면 그때보다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양 : "네, 그러실 것 같아요."
한 : "그런데 저는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민주화운동 할 때나, 국회의원 장관 총리 할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아끼고 절약하면서 풍족하지 않게 사는 모습과 다를 게 없거든요. 아무리 뒤져도, 가지고 있는 재산도 별로 없고요. 이 사람들이 아무리 '부패한 정치인'으로 어떻게 뒤집어씌우든 '나의 삶과 나의 정신은 변하지 않는다!' '양심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고 떳떳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민들 기억에 남는 그녀의 여러 모습 가운데 가장 강렬한 한 컷은 노 대통령 국민장 조사를 읽는 모습일 겁니다. 대통령과 총리, 서거한 대통령과 장의위원장, 고인과 살아남은 자의 조사. 그 기구함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얘기가 그 쪽으로 옮아갔습니다.
양 : "많은 국민들 가슴에 노 대통령 국민장 조사를 울먹이며 읽어 내려가던 모습이 애잔하게 남아 있습니다. 참 힘들게 조사를 읽었던 당시 심경이 어땠습니까?"
한 : "국민장의위원장을 맡았는데 일이 너무 많아 슬퍼하고 눈물 흘릴 겨를조차 없었어요. 조사 초안 완성되고 나서, 읽는 연습을 하는데 끝까지 못 읽겠는 거예요. 계속. 조금 읽다가 울음이 나오고, 또 읽다가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 당일 국민장 시작되고 조사 읽을 순서가 왔는데, '울지 않고 끝까지 읽어야 되겠다.' 오로지 그 생각 하나로 자리에 섰어요. 그런데 뭘…. 이를 악물고 읽기 시작했는데, 되겠어요? 그동안 참았던 게 막 북받쳐 올라오는데…. 어휴, 참…."
양 : "조사 초안에 여러 내용을 직접 넣으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한 : "대한문 시민분향소에 일부러 갔던 적이 있었어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시민들의 추모리본을 한 시간 남짓 걸으면서 꼼꼼히 읽어봤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장의위원장 조사라는 게 별것 있겠는가. 이 많은 시민들이 절절하게 여기 써 놓은 말, 눈물, 목소리. 이게 다 조사구나.' 그때 리본에 쓰인 글 가운데 감명 깊었던 문구를 집어넣었습니다. 노 대통령 조사는 윤태영 대변인이 초안을 잡고 내가 손을 봤지만, 대체로 시민들의 말을 제가 대신 한 것뿐이라고 생각을 해요."
"눈물의 조사, 시민들 마음을 대신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