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찾아간 거북바위는 우구데 칸이 태평치국을 기원하여 세웠다 한다.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올라가 보니 하르허린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거북바위에는 현재의 몽골 기에 등장하는 별과 해와 달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말의 머리뼈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달리기를 잘하는 말들의 머리뼈라고 한다. 죽어서도 힘차게 달리던 초원을 내려다보라는 뜻일까.
하르허린을 떠나 이제 오늘 묵을 곳으로 차를 달린다. 포장도로로 몸은 편안했지만 그만큼 여행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앞섰다.
멀리 야트막한 모래언덕이 뵈는 곳으로 차가 접어들었다. 여기저기 산뜻한 겔들이 늘어선 캠프촌이 나타나고, 낙타를 탄 관광객들이 눈에 띈다. 여태껏 우리가 묵었던 겔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야말로 관광지이다. 모래는 곱지 않았지만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고, 호수까지 있어 그야말로 오아시스 같은 느낌을 준다. 발음도 아리송한 '엘슨타사르하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모래와 평원과 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한다.
멋진 겔들을 모두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단출한 겔 너덧 채가 외따로 모여 있는 곳에 머문다. 한적하니 마음에 든다. 바위산도 가깝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낼 만큼 호젓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주변 풍경에 환호성을 지른다. 실제로는 해가 있을 때에 일찌감치 숙소를 잡았다는 점을 기뻐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곳이라고 나그네를 고이 재울 리가 있을까. 난로가 없다는 것이다. 겔 안은 비가 온 끝이라 시서늘하기만 했다. 사정을 해 보았지만 주인 할아버지는 눈을 부라리며, "추우면 보드카를 마시라"는 말만 했다. 간신히 사정을 하여 여자들 겔에만 난로를 가져다주기로 했다. 일흔은 족히 넘어 뵈는 주인 할아버지는 내게 난로를 들라고 했다.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이드가 말리는 바람에 내려놓자, 할아버지는 실실 웃으며 난로를 번쩍 드는 게 아닌가. 농담도 즐기고, 유목민의 기개가 물씬 풍기는 할아버지였다.
여자들이 낙타를 타러 가는 동안 마당에서 배구를 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하는 배구도 재미있었다. 저녁으로 양고기를 데워 먹기로 했다. 내일이면 울란바타르에서의 시내 관광이 하루 남기는 했지만, 초원에서 머무는 것으로는 마지막 밤인지라 그동안 애쓴 스텝들과 한자리에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힘든 만큼 정도 깊이 들어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도 아쉬움이 흠씬 묻어났다.
노랫소리를 듣고 찾아온 주인 할아버지가 구수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알타이의 노래가 흥을 돋웠다. 78세라는 주인 할아버지는 우락부락한 인상과는 달리 정도 많고 흥도 많은 분이었다. 칼을 들고 양고기를 연필 깎듯 깎아서 돌아가며 나눠 주었다.
밤은 깊어가고, 하늘은 모처럼 총총한 별들을 보여 주었다. 근 보름 가까이 몽골의 북중부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느라 몸은 곤하였지만 그만큼 사연도 많고, 추억도 깊이 남는 여행이었다. 길에다 내려놓고 가버린 운전사와 차의 문제는 덮어 두기로 했다. 당연히 여행사 측에 배상을 청구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애쓴 스텝들의 노고와 밤새워 산길을 달려온 가이드 버기의 정성은 그를 갚고도 남을 감동이었다.
알타이 산맥을 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술을 마시며 이런 아쉬움을 전했더니 미가와 톳사가 꼭 다시 오라고 했다. 미가의 고향이 알타이 쪽이라고 했다.
마지막 밤의 '게르 한 채'
밤은 깊어가고 은하수는 도도히 흐르는데, 겔에 둘러앉아 이번 여행의 소감을 나누었다. 함께 여행을 하고, 같은 길을 걸었어도 느낌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슬며시 마당의 풀들이 흔들리기만 해도 항가이 산자락에서 흔들리던 가냘픈 들꽃들을 떠올리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꿈결 같은 황홀한 별들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바람도…. 그러나 몽골은 그 모든 것을 떠난 뒤에 더욱 깊이 가슴에 새겨 놓는가 보다. 그날, 겔에 둘러앉아 박일환 시인이 읊던 '게르 한 채'라는 시처럼.
몽골에서 무엇을 보고 왔느냐 물으면
누구는 초원을 가리키고
누구는 바람을 불러오고
누구는 밤하늘의 별을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게르 한 채 보고 왔다고 대답하리
멀리서 바라보면
몽골 하늘의 희디흰 구름 빛깔을 닮은
게르 한 채
외로워서 빛나는 그 쓸쓸함을 노래하리
초원도 바람도 별도
가축마저 얼려 죽인다는 한겨울의 추위도
게르 한 채에 모두 담겨 있으니
그 안에서 밥을 해먹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누천년을 이어 살아오는 동안
지배하지 않되 지배당하지도 않은
게르 한 채의 역사를
내 안에 온전히 받아 모시는 일이
내 삶의 과업이 되어야 하리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추후 리얼리스트100, 남양주뉴스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년 7월 23일부터 8월 6일까지의 몽골북중부 기행의 마지막 글입니다. 울란바타르의 8월 5일, 6일 일정은 생략합니다.
2011.01.03 09:52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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