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방 안에 내 것이라고 놔둔 아담한 나무 책상이 정겹다.
이명주
어쨌든 모든 우려를 뒤로하고 현재 필리핀 바클로드 모 어학원에서 3개월 연수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나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자의 반 타의 반 다양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처음 올 때는 괜한 데 힘 쏟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자 했지만 그게 뜻처럼 되지 않았다. 하여튼 이 과정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이 본인의 '나이'다.
대개 외국에 오면 나이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는데 유학생과 어학원 직원까지 99%가 한국인인 이곳에선 만나면 제일 먼저 받는 질문이 "몇 년생이세요?"다. 그 중 또 대다수가 사회경험 없는 20대 초반인지라 어디서 얼마만큼 일했다식의 커리어는 대개 주제가 되질 못한다. 그러니까 결국 나이가 문제다.
그 결과 얼마 전 내 어머니 또래 아주머니가 입학하기 전까지 '여자 최고령' 연수생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열아홉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분이요, 90년생 어쩌고 하는 애들이 "밥 드셨어요?" "잘 주무셨어요?" 같은 극존칭 멘트를 날릴 때면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유로운 영혼으로 늙는 게 결코 쉽지 않겠다 자각도 하게 됐다. 회사 다닐 적엔 실상 막내는 아니라도 입사 선배들에 가끔 애교도 투정도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 주책이라고 욕 먹는 거 아닌가' 하는 눈치까지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간 아이 같이 구는 어르신들께 맘속으로나마 핀잔 준 걸 반성했다.
현지인들 역시 표현방식은 달라도 본인 나이를 알고서 깜짝 놀라긴 매한가지다. 필리핀에 도착해서 첫 나흘은 세부에 머물렀는데 그땐 레즈비언 의혹을 사기도 했다. 대개 "왜 혼자 여행해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몇 살인데요?" "아직 결혼 안 했어요?", "아이도 없어요?"(미혼모가 흔한 탓인지 이 질문도 꼭 잇따른다)로 이어진다.
아직도 당황스러운 질문 하나, "왜 결혼 안 했어요?"
바로 전날에도 어학원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구입하는데 앳된 여점원이 나이를 물었다. 스무 살 후반까지도 간혹 술집에서 민증을 요구받으면 '그래, 아직은 건재해' 하고 뿌듯해했지만 이젠 그 단계도 넘어선지라 되레 나이는 왜 묻냐 반문했다. 당황하는 듯해서 그냥 "Thirty three(33)"라 답했더니 다음은 예의 질문들이 쏟아졌다.
서른 살 어느 때까지는 길 가다 "아줌마!" 소리를 들으면 부러 못 들은 척을 했다. 그것은 결코 나를 부르는 호칭이 될 수 없다는 오기에서였다. 하지만 이제 목욕탕이나 백화점 등에서 나를 호명하는 것이 명백한 "아줌마!" 소리에 웃는 얼굴로 뒤돌아본다. 애 둘쯤 있는 아줌마여도 무방한 나이임을 인정한 것이다.
되레 "아가씨" 하고 부르면 입가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또 아주 가끔이지만 "어려 보이시네요"란 말을 듣거나, 내 나이를 알게 된 상대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해주면 '기분좋음 지는 거다'란 사실을 알면서도 순순히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이만큼의 내공이 쌓였음에도 여적지 당황스러운 질문이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