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유사 전백기 옹이 간재 선생의 발자취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 옹은 간재 전우 선생의 증손이기도 합니다.
조종안
전백기(88세) 도유사(都有司)는 처음엔 봄가을에 향사(享祀)를 봉행했으나 1년에 한 번으로 줄이고, 농어민이 한가한 음력 2월로 정했으며, 문인들이 육지에서 갯벌을 걸어 들어오기 편리하도록 물이 가장 적게 들어오는 조금날 치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관선록에 의하면 당시 조선 팔도에서 모여든 간재 선생 제자는 제주도 22명, 북간도(만주) 25명을 포함하여 3천 명을 헤아린다. 현대 인물로는 강암 송성룡, 가인 김병로, 국회의원을 지낸 윤제술, 소선규·소완규 형제 등이었다.
전 도유사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계화재(繼華齋)만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학당 13개를 건립하여 연수에 진력케 하였다"며 "성리학은 인간성 규명과 순선 무악 천부성을 개발하는 학문으로 '인의충신선행(仁義忠信善行)' 하기를 즐거워한다"고 부연했다.
조선말 어진 화가 채용신(1848~1941)이 그린 심의(深衣) 차림의 간재 선생 영정을 계양사에 걸어놓았는데 20년 전 정월 그믐날 저녁에 도난당했다고. 전 도유사는 당시 경찰서와 문화재청에 신고했어도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며 꼭 찾도록 협조해달라고 간절히 당부했다.
지역 어르신들도 많은데 군산 문화원장(이복웅)이 초헌관이 된 사유를 묻자 "큰 공을 세운 분이니까요. 신시도에서 나도 모르고 있던 간재 선생 학당 터하고 유허비를 작년 6월에 찾아내셨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학자이신 이 원장을 모셨습니다"라며 치켜세웠다.
1922년 7월 4일 간재 선생이 82세 나이로 세상을 뜨자 법에 따라 9월 초 김제에서 하루 유하고 익산으로 모셨다고. 당시 상여를 따르는 자손과 말을 탄 문인이 2천 명이었고, 참례자가 5만이 넘었으며 장례 행렬이 '시오리'(6km)에 달했다고 한다.
간재학교 설립한 계양서원